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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촌 진료 35년…의사란 직업은 축복입니다"

"쪽방촌 진료 35년…의사란 직업은 축복입니다"

  • 이은빈 기자 cucici@doctorsnews.co.kr
  • 승인 2012.07.1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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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초 건국의전원 교수, 국민추천포상 수상
신부 되려다 택한 의대·묵묵히 실천한 봉사 소회

▲'쪽방촌 하얀 옷의 천사'로 불리는 고영초 교수. 익명의 추천으로 최근 국가로부터 국민포장을 받았다.
지난 3월. 수술을 마치고 숨을 고르던 고영초 건국의전원 교수(건국대병원 신경외과)의 휴대폰에 낯선 번호가 찍혔다. 그의 거주지인 과천시청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고영초 교수님이시죠? 국민 추천이 들어와서요, 시간 날 때 시청으로 방문해서 인터뷰 해주시면 됩니다."

진료에, 수술에, 봉사로 짬을 내기 어려운 고 교수는 양해를 구하고 밤 무렵 청사를 찾아가 덤덤히 인터뷰에 응했다. 얼마 뒤 국민포장 최종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연락이 왔다.

국민추천포상 제도는 역경 속에서 묵묵히 선행을 실천해온 평범한 이들에게 국민 추천을 받아 국가가 훈·포장을 하는 제도로 올해가 두 번째다. 지난해 고 이태석 신부의 수상으로 화제가 됐다.

행정안전부는 473건의 추천서를 받아 공적 확인과 국민추천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국민훈장(2명), 국민포장(8명), 대통령표창(8명), 국무총리표창(6명) 등 최종 수상자 24명을 선정해 6월 발표했다. 이 가운데 고 교수는 국민포장을 받는다. 그는 "누가 추천했는지 모르겠다"며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작년 모 일간지에 제 활동을 담은 기사가 크게 나가고, 이번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축하 전화를 받았어요. 알아보는 분도 계시고. 갑자기 사회적 반응이 너무 달라져서 사실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저는 똑같은데 말이죠."

그의 '똑같다'는 표현은 여전히 사회 소외계층을 진료하고 그 속에서 삶의 기쁨을 찾고 있음을 뜻한다. 올해로 35년째. 고 교수는 2주마다 돌아오는 수요일이면 서울 시흥동의 전진상(全眞常)의원을 찾아 소외계층 환자들을 만난다. 다음은 고영초 교수와의 일문일답.

 

국민포장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학창시절부터 봉사를 해온 걸로 알고 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많이 알려진 얘기지만, 원래 신부가 되려고 했어요.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면서 고등학교도 신부 양성소 같은 개념의 가톨릭계 학교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특수 고등학교랑 일반 고등학교는 커리큘럼이 상당히 달랐거든요. 고2 겨울방학 때 편입시험 광고를 우연히 보고는, 일반고로 편입해 공부해서 덜컥 의대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신부가 영혼을 치료하는 사람이라면 의사는 육신을 치료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잖아요. 지금도 제가 잘해서 의대에 진학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의 섭리랄까. 봉사는 하나님께 진 빚을 갚기 위해 시작한 겁니다.

평소 생활은 어떻습니까. 현재까지 소화하고 있는 봉사 일정을 소개해 주신다면.
대학 다닐 때 가톨릭학생회에서 활동하면서 매주말 선배들과 함께 약봉지를 들고 무작정 양평이나 성남시 외진 동네를 돌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경기도 일대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무의촌이 있었죠. 졸업하고 인연이 닿아 전진상의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의료봉사를 한 게 지금까지 온 겁니다.

평일은 2주에 한 번씩 그곳에 가고, 주말에는 영등포 쪽방촌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요셉의원과 외국인 노동자를 진료하는 혜화동 라파엘 클리닉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처음에는 의사가 턱 없이 부족했는데 요즘은 전문의들이 많아져서 혼자 볼 때 보다는 여유가 생겼죠.

 
봉사하는 세 곳에서의 분위기는 어떤지. 대상 환자가 다른 만큼 초기 적응과정에서의 어려움도 상당했을 듯 한데요.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전진상의원은 고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으로 설립된 무료 진료소인데, 따뜻한 느낌이 있어요. 저에게 진료 받은 어떤 할머니는 고맙다고 박카스 한 병, 껌 한 통을 주시기도 하고.

반면 요셉의원은 사회에서 정말 소외된 계층들을 진료하는 곳이에요. 행려자나 노숙인이 주로 찾기 때문에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부에서 돈 받으면서 제대로 안 봐준다고 따지기도 하고요. 바지에 대소변이 묻어 있는 건 기본에, 밥도 며칠씩 거른 사람이 많아서 기본 케어부터 해주고 진료를 합니다.

라파엘 클리닉은 중소기업 한국인 사장한테 온갖 학대를 받아서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를 이룹니다. 보고 있자면 딱해서 '나라도 잘해줘야지' 계속 생각하게 돼요.

인상 깊은 일화가 많을 것 같은데, 떠오르는 한 가지만 소개해 주신다면.
아, 정말 수도 없는데…(웃음). 요셉의원에 있을 때였어요. 50대 남성 환자가 찾아왔는데 부랑자라 온몸에서 악취가 말도 못하고, 바지는 분비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솔직히 그럴 땐 아무리 의사라도 회피하고 싶거든요. 소극적으로 진료하게 되죠.

결단을 내리고 환자의 바지를 벗기고 면밀히 보니 척추 종양이 심각했습니다. 괄약근이 풀려 있고 감각이 떨어져 있었어요. 빠르게 MRI를 찍고 수술에 들어간 결과 성공적으로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 때 적극적으로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래서 더 뿌듯하기도 했고요.

의학전문대학원장으로서 학생들의 의료봉사 전도사로도 활약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건국대에 온 다음해인 2006년 의료봉사 강좌를 정식 수업으로 개설했어요. 사회의학 커리큘럼의 하나로, 어떻게 하면 의사들이 행복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수업입니다. 의료윤리나 존엄사 등의 이슈도 다루지만 가장 강조하는 건 역시 봉사하는 기쁨을 전하는 겁니다.

국내와 국외로 나눠서 유명 봉사단체를 소개하고, 거기서 실제 일하고 있는 의사를 초청해 강연을 맡기는 식이죠. 시험은 따로 없고 소감문만 받습니다. 학생들의 반응이 무척 좋아서, 한 학년의 절반 이상이 자발적으로 봉사 클럽의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들어오는데 경쟁률도 꽤 치열하다고 들었습니다(웃음).

의사에게 있어 봉사란 무엇일까요.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설계하고 있습니까.
5월 9일 의전원장으로 취임했으니 사실 긴 시간은 아닙니다. 좋은 의사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사람마다 정의가 다를 수 있는데, 제가 보기엔 명의라고 해서 좋은 의사라고 볼 수는 없어요.

우선 실력을 갖추고, 불쌍한 사람과 아픈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어야죠. 건전한 생각이 있어야 하고 스스로가 건강해야 합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취미나 운동, 종교를 갖고 있으면 더 좋죠. 마지막으로 삶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을 알고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의사가 좋은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봉사는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받는 거예요. 해보면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환자의 눈물 한 번 닦아주고, 손을 잡아줬을 때 느껴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있어요. 수요일은 병원에서 5~6시간 걸리는 수술을 하는데, 봉사 현장에 가서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날아가 버립니다.

저는 정년퇴임 이후에도 일할 데가 너무 많아서 걱정이에요. 말할 수 있고, 귀가 들리면 의료 상담이라도 할 수 있으니 의사는 그 자체로 축복 받은 직업이라고 확신합니다.

 

고영초 교수가 걸어온 길 1977년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신경외과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림대학교 부속 강남성심병원 신경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독일 하노버의대 교환교수를 지냈다. 서울백병원 신경외과 주임교수를 역임하고 2005년부터 건국대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감마나이프센터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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