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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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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10.24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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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이혁(대한의사협회 고문,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총재)

니힐리즘(nihilism)은 무(無)를 의미하는 라틴어 니힐(nihil)에서 유래한 것으로, 투르게네프(Ivan Turgenev, 1818∼1883)가 그의 작품 <아버지와 아들>(1862)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허무주의로 번역되고 있는데 니힐리즘의 원래 뜻은 "절대적인 진리·도덕·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회의주의·상대주의·무정부주의도 니힐리즘의 한 종류로 볼 수 있다.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명 작가이며, 농노제도를 반대하고 이와 관련된 많은 작품을 냈는데 <아버지와 아들>에서는 니힐리스트인 '바자로프'를 등장시켜 아버지와 아들 2대의 사상적 대립을 묘사하였다.

니힐리즘은 절망적 니힐리즘과 능동적 니힐리즘으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어떠한 주장이나 주의도 무시한 채 인생에서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다는 주장이며, 후자는 자유로운 인생을 적극적으로 찾으려 하는 것으로 실존주의가 이에 해당한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니힐리즘의 등장을 예언하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와 같은 니힐리즘 사상은 19세기 후반 니체·도스토옙스키 등의 사상에 반영되었고, 20세기에 들어 와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대학 동기생 중 한 명이 김정진 형이다. 그는 이미 오래전 저 세상으로 갔는데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방사선학(영상의학)의 거목이며 6척 장신의 거구였는데 축구를 비롯해 모든 스포츠 분야에서 만능선수였다.

전남의대 학감으로 오랫동안 근무한 후 한양대병원 방사선과장으로 활약했고, 정년 후에는 한국건강관리협회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서울의대 학생시절에는 대한협동당 학생부장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체포령이 내리자 피신했다가 8개월 만에 8·15광복을 맞이하기도 했다. 필자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학생시절부터 우리는 몹시 가까이 지냈다.

여기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학생시절 그가 니체에 심취했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어느 의미에서 니힐리즘에서 벗어나려는 디히리스터였다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김 형은 니힐리즘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대학 예과 시절에 그는 유난히 고독을 선호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예과 시절 우리 급우들은 주말이 되면 무리를 이루어 남한산성을 빈번하게 방문했는데 많은 경우에 언제 왔는지 혼자서 묵묵하게 지내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기뻐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는 니힐리즘에 빠졌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앞에서도 적은 바와 같이 니체는 니힐리즘을 부정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래도 니힐리즘 하면 니체를 떠올리게 될 만큼 니체와 니힐리즘은 특수한 관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대학 예과 시절의 이야기이므로 요사이와는 거리가 멀다.

니체가 오해를 받은 일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가 니힐리즘의 철학을 유포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치 사상에 토대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적은 바와 같이 니체는 니힐리스트가 아니었고, 비판자였다. 오히려 그는 반종교자라고 하는 것이 옳은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시의 종교는 기독교를 말하는데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도덕과 진실은 기독교 도덕과 진리를 말하는 것이며,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금전과 이윤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다시 말해 니체의 철학은 '생(生)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까지 서구에서 절대가치와 진리는 기독교 도덕이었다. 그런데 니체는 기독교 도덕은 존재하지도 않는 가치를 믿게 하려는 종교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 도덕은 진짜가 아니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니체는 니힐리즘에서 탈출하기 위한 새로운 니힐리즘을 생각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니체의 이름이 아돌프 히틀러 및 파시즘과 연결되었다는 설은 그의 누이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표적인 국수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인 바른하르트 푀르스터와 결혼 했는데, 1889년 푀르스터가 자살한 뒤 니체를 푀르스터의 이미지로 개조했다.

그녀는 니체의 작품을 무자비하게 통제했고, 탐욕에 사로잡혀 니체의 버려진 글들을 모아 <Der Wille Zur Macht, 권력에의 의지>(1901) 등을 출판했다. 히틀러에 대한 그녀의 열렬한 지지 때문에 대중은 니체를 독재자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상의 두 가지는 니체를 모함하는데 빈번하게 활용되었지만 실제로 니체는 그와는 반대되는 생애를 걸었다.

한편 김정진 형은 후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어 천주교내에서 주요 직책을 맡기도 했다. 어찌 생각하면 니힐리즘과는 반대되는 인생을 걸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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