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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소심한 진료비
청진기 소심한 진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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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8.1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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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 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원장님은 소설책만 읽으시느라 환자한텐 관심이 없는가 봐요."

진료를 받고 계산까지 마친 J씨가 빼꼼 문을 열고 내게 이렇게 말을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환자가 나서기 무섭게 읽고 있던《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에 다시 코를 박은 나는 내심 뜨끔했다. 개원 초부터 단골로 다녔던 환자인데 무슨 서운한 점이라도 느꼈는지 조심스레 이유를 물었다.

보험 설계사인 그녀는 최근에 방광염이 자주 재발되어 직장 근처의 병원을 여러 군데 가보았단다. 지난번에 간 곳에서는 방광염의 원인은 성병이라면서 다짜고짜 각종 성병검사를 시켰고 또 뱃속의 종양이 방광을 누를 수 있다고 해서 초음파 검사를 받아야했단다.

결국 진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었는데 결과에선 성병도 종양도 발견되지 않았고 더 억울한 건 방광염이 금방 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멀어도 우리 병원을 찾아왔는데 나도 환자들에게 검사를 많이 유도하면 수입이 훨씬 나아질 것이고 결론적으로 자기가 근무하는 보험회사의 우수고객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이야기였다.

평소 나 자신도 소극적인 진료에 대해 회의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가려워서 온 사람은 가려움만 해결해 주면 되지 확대해서 포괄적인 검사를 권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융통성 없는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오래전 기억이 한 몫을 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꼬마시절의 일이다. 어머니는 간혹 외출을 한다면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코티분을 뽀얗게 얼굴에 발랐다. 응당 집에서 나랑 놀아줘야 할 어머니가 혼자 나간다는 사실에 심통이 생긴 나는 동네 어귀까지 따라가며 데리고 가라고 떼를 썼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집을 잘 보라면서 '센베와 오꼬시'를 한 봉지 사서 안겨주곤 했다. 자칫 급하게 먹으면 입천장이 홀딱 까지곤 하는 그 딱딱한 과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소기의 목적을 이룬 성취감에 흐뭇해하며 바둑이가 낑낑거려도 모른 척 하다가 언니 오빠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전리품처럼 내어주었다.

그날은 해가 저물어도 어머니가 돌아오시질 않았다. 온 식구가 뚝방까지 나가 어머니를 기다렸다. 달이 중천에 뜰 무렵에야 모습을 드러낸 어머니는 더듬더듬 사태를 설명하였다. 종로에서 아버지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려는데 우연히 고교 은사님을 만났단다.

몹시 반가워하시는 그 분과 다방에 갔다가 찻값을 지불하고 나니 차비가 모자라게 되었다는 것이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새까매진 버선을 힘들여 벗으면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넌지시 내 이야기를 했다. "막내가 과자를 사달라고 조르지만 않았더라도…."

과자를 먹은 건 언니 오빠가 더 많은데 혼자 원망을 들은 나는 어머니 말에 상처를 입고서 '셈베와 오코시' 따위를 다시는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대가 예상치 못한 지출을 요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만일 내가 환자의 생각보다 과다하게 병원비를 받는 바람에 혹시 그 환자에게 큰 차질을 빚게 만드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영영 소심한 의사로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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