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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잃어버린 노래

청진기 잃어버린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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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6.2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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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 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창가에 쏟아지는 햇살은 분주히도 반짝이는데 나는 왜 이리 무료할까? 날이 더워 환자가 뜸한 건 그렇다손 치더라도 요즘 들어 부쩍 제약회사 방문객이 줄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예전에는 영업사원이 하루에 두어 명씩은 다녀갔으니까 일주일이면 열 명 남짓을 만나곤 했다.

더러 여자 사원도 있지만 대개는 젊고 패기 넘치는 말쑥한 차림의 청년들이다. 개중에는 우렁찬 목소리로 조리 있게 말하는 이도 있고, 병원이 두려운 건지 의사가 무서운 건지 쭈뼛거리며 혼잣말을 하다가는 총각도 있다. 개원 초에는 이들을 피하려고 애썼다.

바쁘다는 핑계로 오래 기다리는 사원도 맥없이 돌려보내곤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약품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잘 알려줄뿐더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되도록 헛걸음 하는 이가 없도록 두루두루 만난다.

그들은 이따금씩 볼펜이나 달력, 손거울, 만보기 따위를 갖다 주었는데 그런 판촉물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 결코 요긴한 물건이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루는 체격이 좋고 활달한 성격의 청년이 찾아왔다. 그는 대학생 때 가요제에 나갔다더니 갑자기 목청을 가다듬어 멋진 발라드를 한 곡 뽑았다. "날 모두 다 주고 싶어, 널 위해서라면. 오직 나만이 네 가슴에 숨 쉴 수 있게"로 시작하는 조장혁의 <러브>였다.

아무리 노래를 잘 해도 초면에 반주도 없이 가사를 외워 부르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콧등에 땀이 송송 맺힌 그는 열창을 했다. 안에서 뜬금없이 노랫소리가 흘러나오자 간호사와 환자들이 문 앞을 기웃거리다가 이내 박수로 환호를 했다.

진료실에는 늘상 통증이나, 질병, 또는 치료같이 건조한 낱말들만 맴돌기 마련인데 뜻밖에 달콤한 노래가 흐르니 그 느낌이 색달랐다. 그도 영업 생활 3년 만에 진료실에서 노래를 부르기는 처음이라며 올 때마다 다른 곡을 들려주기로 약속을 했다.

나를 위해 새로운 레퍼토리를 연습했다는 그는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약을 많이 팔아주었냐고? 아니다. 나는 그의 노래를 값으로 매기거나 대가를 지불하고 싶지 않았고 그도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결혼을 해서 아내를 내게 진찰받도록 데려 온 걸 보면 우리 사이에 돈독한 신뢰가 쌓였던 게 사실인 것 같다.

이렇게 노래가 분위기를 좋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된 나는 다른 영업사원에게도 노래를 청해 보았지만 모두 손사래를 쳤다. 그중에서 노래 대신 시를 읊어준 신입사원이 퍽 인상에 남는다.

지난해부터였다. 우리나라 약값에 거품이 많다면서 그 주범으로 제약회사의 리베이트 관행이 지목되었다. 의사와 제약회사 간에 모종의 검은 거래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점차 진료실을 찾아오는 제약회사 직원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앞으론 더 이상 내게 노래를 불러줄 영업사원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오래 지속하기가 참 어려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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