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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였기에 시를 쓸 수 있었고 시인이었기에 훌륭한 의사가 됐다"

"의사였기에 시를 쓸 수 있었고 시인이었기에 훌륭한 의사가 됐다"

  • 김영숙 기자 kimys@doctorsnews.co.kr
  • 승인 2010.12.17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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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시인 마종기

 

 

국민을 내 가족처럼, 환자를 내 생명처럼'을 내건 대한의사협회 제33차 종합학술대회(대회장 경만호·대한의사협회장)가 2011년 5월 13∼15일 서울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종합학술대회 조직위원회(조직위원장 김성덕·대한의학회장)와 <의협신문>은 33차 학술대회를 맞아 '릴레이 탐방 33인-진료실 밖에서 한국의료의 길을 묻다'를 기획했습니다.
이번 릴레이 탐방은 의사회원 가운데 진료실 밖으로 나가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 주인공을 만나 ▲다른 길을 걷게 된 동기 및 배경 ▲일하면서 느끼는 보람 ▲외부에서 바라 본 의사 사회 ▲의사 회원에게 하고 싶은 말 등을 들어봄으로써 한국의료와 의사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기획입니다.

종합학술대회 직전까지 연재되는 '릴레이 탐방'에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주>

의사-시인-미국 거주. 마종기 시인을 특징짓는 이 세가지 요소들은 좀처럼 화학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조합 처럼 보인다.

시인 스스로도 인정했듯 "미국에서 의사로 살고 있는 문인으로 분명 자랑하며 내세울수 없는 이력"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71세의 나이에 현역 시인으로 쉼없는 시 창작을 하는 그를 만나 이야기하면서 "의사였기에 시를 쓸 수 있었고 시인이었기에 훌륭한 의사가 되었다"(문학과 의학 창간호: 문단 50년과 의사 생활 40년)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떡여 졌다.

▲ ⓒ의협신문 김선경

사실 '의사 마종기'가 '시인 마종기'이 되는 것은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는 것 만큼 본능적인 운명이었지 않나 싶다.

마 시인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아동 창작동화의 장의 연 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의 장남이다. 문학적 DNA를 타고 난 탓에 고교시절 문예반과 신문반에서 활동했고, 연세의대 본과 1학년때 현대문학에 추천을 완료해 시인으로 일찌감치 등단했다.

하지만 문학적 본능을 어쩌지 못하는 그를 지켜보는 의과대학 교수들의 시선은 그리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의대 공부는 장난이 아니고 의사의 길은 멀고 험한 것이니 의사가 되든 문인이 되든 양자 택일을 하라"는 충고를 심심치 않게 들었고 두갈래 길에서 그의 고민도 깊어갔다.

"본격적인 의사 수업을 앞둔 본과 2학년 땐 양단간 결심을 해야 할 것 같아 봄방학 2주일간 학원사에서 펴낸 '문예인물사전'을 첫 장부터 뒤지기 시작했어요. 의사이면서 훌륭한 문인들의 이름을 찾을 요량이었는데 예상보다 많이 찾아낼 수 있었어요.

▲ ⓒ의협신문 김선경
고트프리트 벤(독일 비뇨기과의사면서 시인·수필가로 전후 독일 젊은 세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 <시체공시소>), 한스 카로사(독일 내과의사, 시인·소설가 대표작 <젊은 의사의 날>)등 롤 모델을 발견했죠. 한스 카로사가 쓴 '의사 뷔르거의 운명'에선 주인공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empathy(감정이입)에서 나아가 sympathy(연민)를 느껴 자살에 이르는데 큰 감동을 받았고, 그런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도 하게 됐어요."

이 작업은 훌륭한 '의사의 길'과 '시인의 길'을 가고자 했던 그에게 나침판이 됐다. 2주간의 작업을 정리해 '의학문학과 그 주변'이란 글을 61년 6월 연세춘추(연세대학교 학생신문)에 기고했으니 국내 의학문학의 학문적 작업의 첫 디딤돌을 놓은 셈이다.

하지만 의사로서도 시인으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찾아온다.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서명운동에 재경문인 105명의 한사람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의사면허가 박탈 위기에 놓였고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 문인활동을 중단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미국으로 쫓겨 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문민의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한동안 작품 활동에 엄두를 못냈지만 "시를 써서 발표하지 않으면 고국과 연결되어 있는 탯줄과 같은 끈이 끊어져 한 순간 우주의 미아가 될 것이라는 착각"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일년에 8편의 시를 고국에 발표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이렇게 5~6년 터울로 시집을 출간해 12권의 시집(영문시집 1권 포함)과 2권의 수필집, 시 해설 산문집 등을 상재했고, 편운문학상(1997년)· 이산문학상(1997년)· 동서문학상( 2003년)·현대문학상(2009년) 등을 수상했다.

이방인으로서 미국에서의 의사생활이 고단했을 법도 한데 뜻밖에 그는 "천성의 게으름으로 따지자면 너무 황송할 정도로 미국에서의 의사생활은 성공적"이었단다.

미국 오하이오주 마이애미밸리병원 인턴·오하이오의대 방사선과 조교수 겸 방사선 동위원소 실장·오하이오의대 소아과 임상 정교수를 역임했고, 오하이오 아동병원 초대 부원장 겸 방사선과 과장으로 일하는 등 외국인이라는 핸디캡을 전혀 느끼지 못한 '행운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성공적인 의사생활의 수원지를 그는 문학·예술 등 '인문학에 대해 평생 흥미를 갖고 있었던 교양'에서 찾았다.

2002년 만 63세가 되는 해에 그는 미국 의사생활을 은퇴했다. "너무 늦기 전에, 기운이 남아있을 때 어릴 적 꿈꾸어온 문학인으로, 한국의 시인으로 살아보고 싶어서"였다.

여기에 "명석한 두뇌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에 대한 소양이 없어서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친구들의 '진혼'"을 위해 모교에서 의대생의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데 6년간 팔을 걷었다.

"언제가 의사가 될 후배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의 필요성, 그리고 그 활용과 엄청난 보상을 이해시켜 정서적으로 안정된 과학자이면서 인간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모범적인 사회인의 덕목을 두루 갖춘 전인적 의사로 자랄 수 있도록 돕고 싶었죠. "

인문학 교육에 이어 이런 맥락에서 후배 의사·문인들과 함께 뜻을 모아 2일 '의학문학학회'를 창립했고, 초대회장에 추대됐다.

"내 시의 따뜻함·진정성·다정함·평화·겸손 같은 것은 좋은 의사에게 가장 필요한 구비조건이어서 나 역시 늘 갖추고 싶었던 것이었고, 그런 희망사항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에 조금 보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나는 의사 수업을 하면서 남을 배려하는 것을 배웠고, 그 배려의 정신이 나도 모르게 내 시에 인용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훌륭한 의사가 되는 지를 배우면서 결국은 어떻게 하면 따뜻한 시를 쓰는지를 배웠다"는 그의 결론에서 과학으로서의 한계에 부닥친 현대의학에 휴매니티를 불어넣기 위해 왜 인문학이 필요한지를 공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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