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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의사직의 숙명적 모순
청진기 의사직의 숙명적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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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9.0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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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문(가톨릭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정신과/인문사회의학과)
▲ 최보문(가톨릭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정신과/인문사회의학과)

전문직업인으로서 자기희생을 직업전문성의 주요한 약속으로 내세우는 집단은 의사 이외에는 극히 드물 것이다.

표적 전문직에 속하는 법조인의 경우에도 법에 내재된 폭력성을 경계하고 굴곡진 삶과의 균형을 잡는 것이 요구될지언정, 법관의 자기희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건축가, 회계사나 예능인 집단들도 각 전문직마다 감수해야 할 특유의 내적 긴장과 싸움의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 역시 자기희생을 전제로 내걸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의업에는 애초부터 자기희생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느 역사적 시기에 어떠한 이유로 투입이 된 것일까?

히포크라테스 전통의학을 들여다보면, 자기희생의 흔적을 조금은 찾아볼 수 있겠으나 그 핵심은 기술 혹은 기예라 불리던 것으로 현대에는 이를 역량으로 해석하고 있다. 역량을 갖추어 환자의 고통을 치료해주고 그 대신 명성 등의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최소한 해를 입히지 말라"는 격언은 지금은 달리 해석되고 있으나, 당시에는 자기이익 추구의 방종함을 견제하는 최소한의 도덕원칙이었다. 자기희생이라는 계율이 의학에 덧붙여진 것은 중세를 거쳐 근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유대-기독교 시대를 거치고, 역병이 창궐하던 중세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자기희생과 의료는 도덕적 언약으로 묶이게 되었다"고 앨버트 존슨은 기술하고 있다. 덧붙여서 의사면허제도가 전문직 독점권을 보장함에 따라 의사는 환자를 위해 자기희생을 함은 물론 사회의 이익에도 헌신할 것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현대의 의사는 이중의 약속으로 묶이게 된 셈이다.

의사는 생계를 위해 의학과 기술을 통달했으나 이는 환자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고 사회는 공익을 위해 사용하라고 요구한다. 의사단체는 전문직의 이익을 보호하고 독점권을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 의사 구성원에게 행동 규범을 요구하고 있다.

전문가로서의 자기이익 추구와 자기희생이라는 사회적 약속이 동시에 존재하고 요구되는 모순이 의사의 삶을 관통하게 된 것이다. 그 모순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의사헌장이다.

학생시절부터 교육받은 자기희생이라는 단어는 주문처럼 의사의 뇌리에 박혀 있어서 제약회사와의 관계 정립을 위한 논의에서도 의사가 조금이라도 이익을 취할만한 상황은 모두 비윤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버리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기이익을 추구하며, 의사도 자기이익을 챙겨야 하는 생활인이다. 그렇다고 의업을 상업도구처럼 사용하는 의사는 극히 드물고, 또한 의업을 자기희생의 목적으로 하는 의사도 더더욱 드물다.

이런 윤리적 역설은 의업의 저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어서 의업의 본질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의사는 임상현장에서 매일 크고 작은 충돌을 경험해야만 한다.

비보험 약제 처방, 자신의 연구에 덧붙일 사례 환자, 혹은 수익을 올려줄 모호한 검사든간에, 의사의 양심에 경고를 울리며 잠깐이라도 갈등케 하는 수많은 일이 의사의 일상에 점철되어 있다.

의사로 하여금 이 모순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은 의업의 숭고함을 찬양하며 성인의 마스크를 씌워주는 것이 아니다. 흑백논리로 성인의사와과 악당의사를 가르는 것은 선동적 언론과 정책적 전략이 하는 일이다.

의료관련 기업과의 관계로 의사의 이해관계 갈등이 첨예하게 논의되는 지금은 의사전문직의 모순과 역설이 커밍아웃해야 할 때이다. 의사 스스로 의업의 모순을 드러내고 이 모순과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지 않는다면 의사는 앞으로도 계속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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