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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거꾸로 가는 의학용어

시론 거꾸로 가는 의학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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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5.17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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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숙(울산의대 교수 서울아산병원 소아심장과 교수)

"복통을 호소하는 55세된 남자환자입니다. 수년 전 막창자꼬리염 수술을 받았고 이자염을 앓은 적도 있습니다. 감별진단으로 괴사작은창자큰창자염, 거짓막잘록창자염, 깔때기콩팥염이 의심되며 환자가 각종 위창자길 암에 대한 걱정이 많아 샘창자, 잘록창자, 큰창자 보개검사 받기를 원합니다.

심전도법에서 심방잔떨림과 심방된떨림이 보였고, 피배양검사에서 포도알균과 구슬알균이 자라서 오염이 의심됩니다. 굴 엑스선 사진에서 굴염이 보였고 빗짱뼈, 넙다리뼈, 두덩뼈 사진에서 뼈엉성증이 의심됩니다. 과거력 중 관상동맥에 덧대를 넣은 상태입니다."

의학용어를 순수 우리말로 바꾸었을 경우 벌어질 가상 장면이다. 나는 언어학자도 아니다. 다만 매일 학생과 전공의들을 교육하고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의사로서 십 여 년간 추진돼온 의학용어 개정에 관하여 아래와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의 개선을 촉구하고자 한다.

언어라는 것은 상호간의 보편적인 약속이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공감대나 합의 없이 일부 학자가 우긴다고 모든 국민이 사용하는 언어를 어느 날 갑자기 바꾸어서는 안 된다. 국내 의학용어 사전은 과거 수년마다 다시 발간하면서 그때마다 새 용어사용을 주장하여 왔다.

그러나 바뀐 용어를 진료나 강의도중 사용하는 의사는 아무도 없다. 아니 대부분 용어가 바뀐 줄도 모르며 관심도 없다. 다만 의사시험을 앞둔 의대생들과 국내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는 의사들 만이 바뀐 용어를 사용할 뿐이다.

또한 이렇게 쓴 한글논문을 읽는 독자들도 [생소한 순 한글 용어·기존의 용어·영어]로 이중 번역을 해야 하는 불편한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논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짐작컨대 의학용어를 순수 우리말로 바꾸려는 시도는 민족주의의 발로라고 생각된다. 즉 우리가 일상 사용하는 언어에서 중국과 일본의 흔적을 없애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수 천 년에 걸쳐서 우리 말 속에 깊숙이 뿌리 내린 한자를 어느 날 갑자기 모두 지우고 순수 우리말로 바꾸려는 시도는 필요 없을 뿐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균'도 한자인데 연쇄상 구균을 구태여 '구슬 알 균'으로 바꾼다고 순수우리말이 되는가? 지금 새삼스럽게 의학용어를 바꾸려는 것은 우리나라 의학발전, 나아가서 국가경쟁력을 저해하는 일이다.

이제는 이러한 민족적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도 될 만큼 우리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의 의식이 성숙하였고 자신감이 넘치고 있다.

의학용어는 의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간호사·기사· 언론인, 나아가서 모든 국민들이 매일 사용하는 보편적인 의사소통 수단이다.

또한 의학용어를 바꾸면 의사국가고시 뿐 아니라 간호사, 기사 자격 시험문제도 모두 바꾸어야 할 것이며 학술지·의학 서적 뿐 아니라 간호사·기사들의 교과서· 생물학 교과서, 초·중·고 학생 교과서도 모두 바꾸자는 것인가? 의사들만 용어를 바꾸면 각 직종 간, 그리고 의사와 환자, 의사와 국민 간의 의사소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세계는 지금 국경 없는 무한경쟁 시대이고 영어실력이 곧 국가경쟁력인 세상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려면 전문 분야에서의 전문성은 물론 영어실력도 매우 중요하다. 영어교육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구태여 나열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일본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일본의 논문이 전문 학술지 발표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학계가 세계의료계에서 비주류로 머무는 이유는 영어 발표와 토론이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 스스로 인정하듯이 이의 가장 큰 원인은 일본어 교과서 때문이라고 한다. 당장 한글 교과서를 중지하자는 말이 아니라 원서와 영어논문 읽는 실력, 그리고 영어로 발표하고 토론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다.

최근 일부 국내 학술대회에서 초록 구연을 영어로 발표하도록 권장하는 것은 바람직한 변화이다.

둘째, SCI 논문의 중요성은 너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크며 거의 모든 교수들이 이에 사활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임용·승진·연구비신청 등에 필요하며, 대학 평가의 중요한 기준이다.

최근 국내 학술지를 SCI에 등재하기 위하여 영어논문을 적극 권장하여 어떤 학술지는 아예 영어논문만 받고 있으며 SCI 논문을 발표하는 교수에게 장려금을 주는 기관도 많아지고 있다.

셋째, 많은 대학에서 교수에게 전공을 영어로 강의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이런 제도는 더욱 확산되고 있다. 심지어는 인문학도 영어로 강의하도록 강요하는데 응용과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의학을 영어로 강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태도다.

추세가 이러한데도 영어강의를 시작하려는 의과는 아직 없다. 차제에 의대에서도 영어로 강의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네째, 이외에도 학생· 전공의· 교수들의 해외 연수·외국환자 유치·외국의료진의 국내 연수 등 을 위해서도 영어교육이 중요한데 가뜩이나 새로 습득해야 할 의학지식들이 폭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우리말 용어에 덧붙여서 새로 바뀐 순 우리말 용어까지 배우라고 강요하는 것은 후배들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일이다.

결론으로 의학용어개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이미 보편화된 의학용어들은 바꾸지 말고 그대로 사용하자. 둘째,각 명칭마다 우리말을 하나씩만 알자. 셋째, 기존의 한자명칭이 어렵고 우리말이 더 쉬운 경우에는 쉬운 우리말로 바꾸자(예 : macroglossia : 거설증a큰혀증).

넷째, 인플루엔자, 스텐트, 빌리루빈, 미토콘드리아 등과 같이 이미 우리나라말화한 단어들은 영어발음을 그대로 사용하자.

출발선도 이미 뒤처진 달리기 경기에서 영어권 의사들은 날개를 달고 뛰는데 반해 우리는 후배들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아주는 이런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개정용어 사용을 주장하는 것은 실익 없는 민족주의이자 국경 없는 세계에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일이다.

이제 더 이상 과거에 사로잡혀 앞을 보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앞만 보고 달리기에도 바쁜 세상이다.

※ 이 글은 의협신문의 입장이나 편집 방침과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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