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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게 마음을 열다

예술에게 마음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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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12.3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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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벽' 허물고 융합으로 가는 길목에서

▲ 허정아(연세대 교수 미디어아트연구소)
의학과 예술, 그 둘은 어떤 관계일까? 전혀 이질적인 상반된 영역일까 아니면 공유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일까? 언뜻 보기에 의학과 예술은 전혀 다른 논리 속에서 움직이는 철저히 분리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의학과 예술은 인간의 생명과 죽음, 인간의 존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서로 공유되는 부분을 가지며 만난다. 모든 학문들이 분화되기 전, 의학은 자연철학·예술·종교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고대의 의학은 인체와 우주의 관계에 대한 상상력에서 출발하였다.

사실 의학과 예술은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약 1만 오천년 전 발견된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는 의학과 예술이 분화되기 이전의 근원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최초의 예술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는 이 벽화는 고대의 주술에서는 의학과 예술이 미분화된 상태로 공존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새와 황소 사이에 새의 머리를 가진, 엑스터시에 있는 듯한 인간의 형상은 삶과 죽음, 건강을 관장하는 의사의 역할을 하였던 주술사로 추정된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주술로부터 분리되어온 의학과 예술은 각자의 길을 걸어 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 둘의 상호작용은 인류의 문화사 전반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끊임없이 창조를 해야 하는 예술에게 의학은 무한한 상상력의 보고가 되어왔다. 인체의 신비와 생명의 비밀, 의학적 지식은 예술에 아주 좋은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문학적 상상력 속에서는 의학적 기술이 이미 오래 전부터 상상되어왔다.

동·서양의 신화와 문학 작품들에서 이미 첨단과학을 예언하는 수준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의학기술 예를 들어 심장이식 수술이나 뇌수술, 심지어 성형수술까지 상상되었다. 한편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프루스트나 울프,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작가들처럼 질병 자체가 예술창작의 원동력이 된 예들도 많다.

이들에게 질병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상상력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라블레의 <가르강튀아>는 작가들의 의학적 지식이 문학적 상상력에 결정적 역할을 한 예들로 손꼽을 수 있다.

2000년에 세상을 떠난 중국의 의사이자 아티스트인 천전의 경우, 자신이 앓던 '자가면역 용혈성 빈혈'이라는 희귀질병에 대한 탐구를 예술적 상상력의 모티브로 삼아 '생명 프로젝트 - 의사되기(A Life Project - Becoming a Doctor)'라는 일련의 작품들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신체 내부의 크리스털 풍경(Crystal Landscape of Inner Body)'은 수술대 위의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열 한 개의 장기로 신체 내면의 풍경을 형상화한다. 프리다 칼로 역시 자신의 몸, 자신의 병을 예술적 상상력의 소재로 삼았던 경우이다.

인체의 내부에 대한 호기심은 비가시적인 대상을 보고자 하는 인간의 오래된 욕망을 반영한다.

의학에서의 해부학은 의학과 예술 모두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르네상스 시대에 비약적 발전을 이룬 해부학은 인체 내부의 기록에 있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어낸 것인 동시에 예술가들에게 인체를 보다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

▲ '신체내부의 크리스털 풍경', 2000(출처:www.designflux.co.kr)

의사들은 해부학에 있어서 예술가들의 작업을 필요로 했고, 예술가들은 인체에 대한 생생한 드로잉 작업을 통해 예술의 또 다른 장르를 열 수 있었다. 서양의 해부학이 인체내부 묘사의 과학적 분석을 추구한 것과는 달리, 동양 특히 일본의 해부학은 그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활용가능성과 상상적 이미지를 중시하여, 회화의 독특한 장을 개척하기도 했다.

▲ 캐시 어리의 패션쇼. 해부학과 패션디자인을 결합한 의상 콜렉션을 선보였다.

▲ 'The broken column'(self-portrait), Frida Kahlo, 1944
▲ 올랑의 퍼포먼스 '성 올랑의 환생'.

 

 

 

 

 

 

 

 

최근에는 캐시 어리(Katie Eary)라는 영국의 디자이너가 해부학과 패션디자인을 결합하여 의상 콜렉션 작품을 내놓기도 하였다.

해부학이 예술적 상상력으로 전환된 것 외에도 성형수술이 예술적 모티브로 된 예도 있다. 프랑스의 여류작가 올랑(Orland)은 커널아트(Canal Art)의 소재로 성형수술을 차용한다.

그녀의 대표작 <성 올랑의 환생 Reincarnation of Saint Orland>은 자신의 얼굴을 여러 번의 성형수술을 거쳐 변모시켜 나가는 과정을 퍼포먼스 작품으로 기획한 것이다. 그녀의 성형수술 퍼포먼스는 이상적이고 고전적인 미에 도전하면서 정형화된 아름다움의 허구성을 파헤친다.

첨단기술의 발달은 예술과 타 분야와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적 상상력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특히 인체를 중심으로 한 의학과 관련하여 예술은 상상력의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다. 첨단 영상의료기기로 인하여 인체의 신비와 생명의 비밀이 가시화되면서 예술가들은 이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오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메디컬 아트이다. 첨단 영상의료기기를 통한 인체 내부의 신비로운 영상들이 예술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의 정태섭 교수는 <X-선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의사이자 예술가이다.

이외에도 1970년대부터 뇌파의 움직임을 가시화하는 작품들이 선보여 의학과 예술이 융합하는 선구적 역할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 상에서 서로를 보며 뇌파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게 하고, 이렇게 상호작용하는 뇌파신호로 뇌파 드로잉으로 만드는 작품이나 MRI를 이용하여 뇌의 활동을 시각화하는 작품들도 나오고 있다.

오랜 동안 신비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던 뇌의 활동을 이제는 '그리는' 시대가 온 것이다.

포르투갈의 마르타 데 메네즈라는 작가는 단백질 구조를 가지고 자화상을 만드는 '단백질 자화상 Proteic Portrait' 프로젝트를 구상하기도 한다. 이름의 알파벳에 해당하는 아미노산 배열로 이루어진 단백질을 디자인하는 작품으로서, 예술과 의학, 기술의 융합에 대한 실천적 예를 보여준다.

상상력과 과학기술이 점점 수렴되어가는 포스트휴먼시대에 의학과 예술은 더욱 더 가까워질 전망이다. 의학과 예술의 상호보완적 작용은 오늘날 활성화되고 있는 각종 예술치료에서도 구체화되고 있다.

예술이 가진 감성적 측면, 상상력을 동원한 감각의 활성화가 과학적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학과 예술은 수렴되고 있다. 미술·음악·무용·연극 등과 같은 예술이 각종 치료에 적용되고 있는 사례는 최근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의학과 예술의 융합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의학적 상상력은 더 이상 낯선 개념이 아니다. 의학이 예술을 비롯한 타 영역과 연계할 때, 미래 의학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될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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