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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의학에서의 상상력
과학과 의학에서의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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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12.3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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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 '발견'은 데이터에서 나오지 않는다

▲ 홍성옥(서울대 교수·과학사)
17세기 과학혁명기에 과학자들은 과학이 수학과 실험의 방법을 통해 자연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학문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과학이 실험을 통해 사실을 발견하고 이러한 사실의 토대 위에 일반적인 원칙들을 발전시킨다고 강조했다.

베이컨의 후계자를 자청했던 당시 과학자들은 1660년에 첫 과학자 단체인 왕립학회를 설립할 때, "왕립학회의 사업과 목표는 자연적인 것과 유용한 기술, 제조법과 기계적인 실행과 발명품들에 대한 지식을 실험으로써 증진시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종교·형이상학·도덕·정치·문법·수사학·논리학과는 어울려서는 안 된다"고 천명했다.

이후 뉴턴에 의해 완성된 근대 물리학은 실험과 수학을 결합하고, 귀납과 연역을 이용해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내는 과학적 방법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됐다.

과학에서 상상력의 축출

과학혁명 이후 다른 학문 분야들은 자연과학을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의학에서도 이러한 노력이 이어졌는데, 많은 연구자와 의사들이 인체와 질병에 대한 사변과 허황된 이론이 아닌 사실과 실험에 입각해서 의학을 정립하고 의술을 베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노력했다.

19세기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는 1865년에 출판된 <실험의학서설>에서 의학이 과학이 되기 위해 갖춰야 되는 방법론으로 실험적 방법·연역과 귀납·가설과 사실에 의한 가설의 검증·이러한 검증으로 정립된 이론 체계·인과관계의 발견 등을 꼽았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적이고 도식적인 '과학적 방법'이 강조되면서, 과학에서 상상력의 역할은 극도로 위축됐다. 근대과학자들은 상상력이 과학에서 절대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나쁜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마술사들이 상상력을 통해서 언어와 사물·정신과 육체·대상과 주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신비주의를 설파했다는 이유가 있었다.

마술사들은 단어가 사물에 영향을 미치고, 마음이 병을 낫게 하며, 무엇을 상상하는 것이 실제 그것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고 보았는데, 17세기 과학자들은 바로 이렇게 상상력이 검증되지 않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을 비판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베이컨은 상상력 때문에 지적인 비약과 잘못된 제안이 나온다고 비판했으며, 감각과 이성이라는 두 능력만 적절히 사용하면 자연의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른 과학자들도 상상력이 불안정하고 근거가 없으며, 우리의 감각을 속이며, 끝없는 불안과 말썽의 원인이라고 비난했다.

철학자 헨리 모어는 "상상력은 새로운 과학이 아니어야 할 모든 것"이라면서, 상상력이 불확실성, 불명료함, 비현실성, 비합리성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고 폄하했다.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상상력이 밀려나면서, 의학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근대 초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상상력이 병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의사들은 우울하면 신체의 방어력이 떨어져서 전염병에 걸리기 쉽다고 생각했고, 또 상상력의 힘은 삶을 연장하기도 한다고 보았다.

▲ 컴퓨터그래픽/윤세호 기자 seho3@kma.org

16세기에 유명했던 의사 파라셀수스에게 상상력은 물질계를 바꿀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이었다.

그렇지만 17세기 세상을 물질과 운동으로만 파악하는 기계적 세계관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의학에서도 상상력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정부는 자석과 최면을 이용해서 병을 치료해서 유명해진 메스머의 의술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조사하는 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이 위원회에는 미국의 과학자이자 정치인 벤자민 프랭클린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세한 조사 끝에 "메스머 효과는 메스머주의자들의 과열된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본질이 무엇인건, 상상력은 의사에게 권장할 만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상상력과 창의성

그런데 문제는 창의적인 과학연구의 그 어느 것도 위에서 언급한 표준적인 과학적 방법론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교과서에 나온 방법론대로 연구를 한 적이 없고, 아마 어떤 과학자도 그렇게 연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1960년대 이후에 발전한 과학철학은 창의적인 과학 활동이 논리적 (혹은 알고리듬 같은) 활동과는 거리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선 가설을 검증한다는 사실은 객관적이고 투명한 것이 아니라, 이론에 의존하는 것들이 많다.

즉, 이론을 검증하는 관찰 결과 자체가 다시 이론에 의존하는 일종의 순환 루프가 존재한다. 또 실험 과정도 생각하던 것보다 매우 복잡하고, 실험 데이터의 해석과 합의 과정에는 인지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요소까지 개입한다.

실험이 이론을 논박할 때 이론은 폐기되는 경우보다 변형되어 살아남는 경우가 더 많고, 과학자들은 합리적 이유만이 아니라 미적이고 심리적인 이유에서 이론을 선택하기도 한다. 과학이 논리적이라면 과학은 컴퓨터에 의해서 더 잘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과학에 논리 이상의 그 무엇이 개입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최근에 몇몇 영향력 있는 과학사학자와 과학철학자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과학적 상상력'에 주목한다.

과학에서 상상력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창의적인 과학자들이 경험 데이터와 과학적 설명 사이의 간격을 시각적 상상력·유비적 상상력·모델을 통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채운다는 것이다.

창의적인 과학적 발견이 데이터에서 (반)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경우는 없다. 뉴턴은 빨주노초파남보로 이루어진 길쭉한 스펙트럼을 보고 태양광선과 같은 백색광이 상이한 굴절률을 가진 단색광들의 혼합체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이러한 결론은 길쭉한 스펙트럼을 오래 관찰한다고 얻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중첩되어있던 원형 단색광들이 용수철을 늘이듯 죽 늘어나는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렸는데, 이러한 가시적(visual) 사고는 과학적 상상력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성과 상상력의 결합

과학적 상상력은 공상이나 백일몽이 아니다. 데이터를 가공해서 아무 설명이나 만들어 내는 힘이 아니라, 서로 연관이 안 되고 꿰어지지 않던 데이터를 하나의 실로 꿰는 통합의 힘이다. 따라서 상상력은 이성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보완하고 이성과 함께 진정한 과학적 방법론을 완성하는 지적인 역량이다.

19세기 후반기에 열정적으로 활동한 물리학자 존 틴달은 과학자 중에서 드물게 상상력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감각의 영역을 벗어난 효과를 우리가 시각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철학자들이 상상력이라고 불렀던 것이다"고 상상력을 정의하고 나서, "우리에게 상상력이 없다면 우리는 과학에서 비판적인 능력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창의적인 능력을 가질 수 없다"고 강조했다.

틴달은 상상력과 이성의 결합을 강조했는데, 이는 상상력이 이성과 결합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과학적 의학(scientific medicine)의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되는 J. H. 와이드는 틴달의 강연에 감명을 받아서 진단과 처방,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에게도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물론 그는 의학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공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며, 또 실제로 숱한 잘못된 이론들이 이러한 공상의 결과임을 비판했다.

그렇지만 사실과 진리에 의해서 인도된 상상력은 아픈 증상에서 병의 원인을 찾는데, 병의 원인에서 가장 합리적인 치료법을 찾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상상력은 비과학적인 것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과학의 방법론에서 상상력의 긍정적인 역할이 재평가 되고 있다. 더불어 과학과 문화예술과의 풍부한 관계도 복원되고 있다. 이를 보면 이제 의학과 의술에서 상상력의 역할이 재평가될 시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의학 분야에서 창의적인 기여를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폐기된 교과서 식의 과학적 방법을 좇아서 연구를 했던 사람은 아니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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