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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알권리'에 파묻힌 의사 `진료권'

환자 `알권리'에 파묻힌 의사 `진료권'

  • 오윤수 기자 kmatimes@kma.org
  • 승인 2001.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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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 처방전 발행매수 규제 급급한 합리화

처방전 발행매수에 대한 논쟁이 정부의 불법 고시에 이어 의료계와 정부간의 커다란 쟁점의 불씨로 되살아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오는 11월부터 처방전을 2매 발행하지 않을 경우 자격정지 등 행정처분을 내리겠다”는 기존 방침을 굳힌 반면, 의료계는 “의사의 `조제명령서'인 처방전을 남발하는 것은 여러가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며 1매 발행에 대한 원칙을 강력히 고수했다. 이처럼 양측의 의견이 평행선으로 달려 처방전 발행매수를 둘러싼 신경전이 점차 고조될 전망이다.

5일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처방전 발행매수에 관한 공청회'는 의료계·보건복지부·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시민단체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처방전 발행매수에 대한 열띤 공방을 벌였다.

약사회는 이날 공청회를 주최한 의협 비상대책위원회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가운데, 그동안 약사회측과 비슷한 입장을 보여 온 시민단체 역시 `할당된' 짧은 시간동안 의견만 발표한 채 공청회장을 빠져 나가 결국 정부와 의료계간의 공방으로 이어졌다.

정부측 대표로 참석한 박경호 보건복지부 의료정책과장은 시종일관 “법을 위반하는 의사에게는 개정된 행정처분 규칙에 따라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원론적인 얘기만 늘어놨다.

처방전 1매 발행에 대한 의료계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건복지부측은 “이미 정해진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다음 법제처 심사를 거쳐 앞으로 처방전을 발행하지 않거나, 1부만 발행한 의사에게 자격정지와 면허취소 등 행정처분을 내릴 것”이라는 확고부동한 입장을 되풀이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측 역시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듯 처방전 2매 발행에 대한 합리화에 급급한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

심평원 노은현 실장은 “처방전 2매 발행은 의약계·정부·시민단체가 합의한 사항”이라며 “처방전 2매 발행을 전제로 수가가 책정됐다”고 주장했다. 노 실장은 “따라서 의료계의 주장대로 처방전을 1매만 발행한다면, 이미 산정된 수가는 삭제돼야 한다”고 주장, 공청회에 참석한 의료계측 인사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이같은 처방전 2매 발행에 대한 정부측 주장에 대해 의료계는 “환자의 알권리라는 미명하에 2매 발행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을 완전히 호도하는 것”이라며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약사의 조제내역서에 대한 의무조항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며 정부측 주장에 대해 강하게 맞받아 쳤다.

이어 의료계가 조제내역서 신설에 대한 필요성을 정부측에 묻자, 복지부 박 과장은 “공식 의견은 아니지만, 보완장치로서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의료계 주장에 동조의 뜻을 내비쳤다.

특히 자유시민연대 공동대표인 임광규 변호사는 일의 분량이 늘고 줄고에 관계없이 공무원의 수는 항상 증가하기 마련임을 통계로써 증명한 `파킨슨의 법칙'을 일례로 들며 “환자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는 상태에서 지나친 행정규제로 의사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은 `행정병'이나 마찬가지”라며 공직사회의 무책임한 탁상행정을 질타했다. 그러면서 임 변호사는 “의사는 고도의 전문직으로서 현실에 맞지 않는 통제보다는 열성을 다해 진료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분위기를 형성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이날 공청회는 박한성 의협 비상대책위원회 정책소위원회 위원장의 진행으로 처방전 발행매수에 대한 각 단체의 입장을 개진토록 했다.

박 위원장은 진행에 앞서 “찬·반 양측의 공방도 중요하지만, 의료계·정부·시민단체가 모처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장'을 여는 단초가 되길 기대한다”며 “앞으로 뜻을 모아 합리적인 의료정책을 함께 펴나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날 공청회에서 발언한 토론자의 주요 발언 요지.
▲박경호 보건복지부 의료정책과장=당초 의료계, 약계, 시민단체가 처방전을 4매 발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4매는 너무 많다는 주장이 제기됨에 따라 관련단체가 다시 모여 논의한 끝에 2매로 줄이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현재 처방전 발행매수에 대한 환자들의 혼란이 야기됨에 따라 많은 민원과 진정이 발생하고 있으며, 감사원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행정처분 개정을 지시해 놓은 상태다. 보건복지부는 11월부터 처방전을 발행하지 않거나, 1매만 발행하다 적발됐을 경우 행정처분 양형을 확실히 하여 제재할 방침이다.

▲노은현 심평원 실장=처방전 내역을 환자 스스로 숙지함으로써 약화사고를 예방하고, 약화사고시 책임 소재 규명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2매 발행은 당연하다. 또한 약국의 조제 내역에 대한 수진자 조회의 가능성과 약제비 심사시 `잘못'된 부분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2매 발행은 필요하다고 본다.

처방전 2매 발행은 의료계·약계·시민단체가 합의한 사항이다. 더욱이 작년 7월에 처방전 2매 발행을 전제로 수가인상이 단행되었기 때문에 처방전 발행매수가 축소될 경우 이에 따른 수가 감축도 병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민식 병원의사협의회 홍보국장=처방전 2매를 주지 않아 환자의 알권리가 침해됐다며 따지거나 항의하는 환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오히려, 환자의 알권리를 보장한다면 환자에게 어떤 약이 투여되는지 철저한 복약지도가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복약지도료가 책정됐는데도 불구하고 복약지도를 시도하거나 복약지도를 성실히 이행하는 약국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동안 의협에서 처방전 2매 발행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한 주장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2매 발행으로 환자의 약화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는 주장은 사실을 호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임광규 변호사(자유시민연대 공동대표)=의사에게 자격정지 또는 면허정지 처분을 내리는 것은 매우 가혹한 일이다. 다시말해 일의 연속성을 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충분한 컨센서스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처방전을 1매만 발행했다고 해서 의사들을 처벌하는 것은 의사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독재국가'라는 오명을 벗기 힘들다.처방전 서식과 기재사항을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한다는 규정은 있어도, 처벌조항을 장관에게 위임한다는 조항은 없다.

의료대란을 겪으면서도 많이 느꼈지만, 정부의 행정규제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들을 꼼짝 못하게 묶어 두는 것 보다는 전문직으로서 성실히 일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풍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강원 경실련 정책국장=처방전 2매 발행은 환자의 알권리 실현이자 환자의 합리적인 의료소비 행위에 기여한다. 환자가 자신의 처방전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약제의 중복 투여를 예방할 수 있고, 자신이 복용한 약에 대한 정보를 기초로 특정약제가 환자에게 미치는 부작용을 줄이는데도 기여할 수 있다.

진찰과 처방, 조제에 있어서 환자의 기본적인 알권리는 원칙적으로 의사에 의한 처방전 2매 발행이나, 의사의 처방전 1매 발행과 약사의 조제 내역서 교부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창훈 의협 전 의무이사(서울 송파구의사회장)=환자의 알권리는 처방전이 환자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이미 충족됐다고 볼 수 있다. 처방전은 의사 고유의 권한인 진료권(의권)의 한 영역이며, 환자를 이해할 수 있는 의사의 도덕적 자세와 전문적 의료기법이 합쳐진, 단순히 과학기술을 넘어선 `인술'로 보아야 한다.

환자의 알권리를 엉뚱한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의사가 처방한 약이 훼손되지 않고 환자에게 제대로 조제되었는지 환자 스스로 확인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약사들이 작성해야 하는 `조제내역서'다. 조제내역서를 의무적으로, 성실히 작성할 경우 만일 약화사고가 발생한다면 책임소재를 명확히 알 수 있어 환자에게 신속한 피해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비현실적인 탁상행정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데 노력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날 공청회에서 제기된 처방전 발행매수에 대한 공방은 평행선에 그친 채, 보건복지부와 심평원, 그리고 시민단체는 환자의 알권리를 이유로 2매 발행을 고집했다.

복지부는 특히 확인되지 않은 `민원'을 들먹이며 의사에 대한 무모한 행정처분 단행 의지를 밝혔다.
이에 대해 의료계를 대표한 대한의사협회는 의사의 진료권과 의약분업의 원칙을 훼손할 수 있는 처방전 남발 보다는 환자의 알권리를 좀 더 현실적으로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조제내역서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했다.

의료계는 특히 의약분업이 시행되고 있지만, 약사의 불법 행위인 대체조제가 심각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며 아직까지 실시되지 않고 있는 의약품 바코드제의 시행을 촉구했다.
잘못된 의약분업에서 비롯된 의·정간의 대치국면이 오랜동안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모처럼 양측이 한자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의료 현안에 대해 논의했지만, 아직은 시원함 보다는 답답함이 많은 상태다.

못박듯이, 보건복지부는 다음달부터 행정처분을 강행하겠다고 으름장을 내놓았지만, 이에 앞서 처방전서식위원회를 열어 좀 더 진지한 토론과 어떻게 하면 의약분업을 제대로 정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던 공청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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