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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바이러스 전파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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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12.1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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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광 원장(정해광성형외과의원)

네팔 석띠골에서 서너 시간을 더 올라 체빵부족을 만났고, 의사에 목마른 이들을 돌보고 나면 어느새 어둠이 찾아왔다. 돌아갈 길을 걱정하고 있노라니 휘엉청 밝은 달이 올랐고, 양갈래로 늘어선 반딧불이 길을 터주었다. 네팔에서의 추억은 그렇게 힘겨웠지만 아름다웠다. 그저 성심껏 부족민들을 돌보며 나눔을 전하고 싶었을 뿐인데 '톨로-만체(위대한 사람)'라는 칭호가 돌아왔다. 크리스찬 닥터로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과 쉰 살의 적지 않은 나이에 세계를 품는 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해광 원장이 꼽는 인생 최고의 선택이다.

▲ 네팔 두사랑 체빵마을에서 진료하는 정 원장 부부
네팔 체빵(CHEPANG) 부족과의 아름다운 인연
"우리나이로 쉰이 되면서, 조금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크리스찬으로서 선교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가지고 있었고 2000년도에 부부가 함께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는 네팔을 떠올렸지요. 저의 은사이신 김명호 연세의대 교수님이 그때 바라트플 국립보건대학 학장이셨는데, 마침 기회가 닿아 그 뒤를 잇게 됐지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정해광 원장은 보건환경이 열악하고 의료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네팔에서 한국의 외무부산하 기관인 국제협력단(KOICA)과 네팔 정부의 협력 사업으로 설립된 네팔 최초의 문교부 산하 바라트플 국립보건대학의 학장으로 봉사하는 기회를 얻는다. 산악과 오지를 넘어 주민들이 살고 있는 무의촌을 진료하는 한편 보건행정이나 예방업무를 담당하는 보건요원을 양성하여 네팔의 낙후된 보건수준 향상에 기여했다. 

정 원장은 특히 네팔 체빵부족과 특별한 인연을 맺어왔다. 바라트플에서 승용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가난하고 낙후된 체빵부족은 네팔 중부 산악지역에서 수렵과 열매 채취 등으로 연명해오던 부족이었다.

"화전을 일구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며 아직도 동굴에서 기거하는 부족민들이 있을 정도로 열악하다는 말을 듣고 현지 조력자였던 아내와 함께 산을 오르내리며 마을을 방문했지요. 그들의 삶을 마주하고 심신의 아픔을 치료하는 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때 17살 한나와 15살 싼티를 만났다. 이들은 각각 6학년, 4학년으로 산아래 마을로 통학하며 학교를 오갔는데 새벽 3시에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고 수업을 마친 후에도 3시간을 걸어 다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 원장은 그 아이들이 눈에 밟혀 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주고 양식을 팔아주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은파기숙사의 시초가 됐다. 2003년 11월에는 기숙사 사감 부부를 영입하고 본격적으로 빈곤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을 합숙시키며 꿈을 키워주기 시작했다. 현재 남학생 8명과 여학생 6명 그리고 사감 부부까지 16명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8월 한나가 드디어 졸업고사를 통과하고 대학에 진학했는데 마치 내 자식인 양 즐겁더군요. 소녀의 장래희망은 체빵부족을 위해 헌신하는 여교사입니다!"

정 원장은 향후 기숙사를 신축하여 학생들을 더 늘려나갈 생각이고 체빵부족의 문화를 알리는 문화센터와 경제적 자립을 위한 직업훈련센터까지 운영하고 싶다고 밝혔다. 네팔에 있는 협력자들과 이메일과 메신저를 통해 수시로 연락하며 일년에 두어 차례 무료봉사활동을 위해 네팔을 찾는다.

은혜로운 파도, 널리 퍼지길
1992년 캄보디아 프놈펜 국립병원에서 구순열 환자를 수술한 것을 시작으로, 17년간 몽골·중국·태국·방글라데시·필리핀 등지를 돌면서 의료봉사를 해온 정 원장, 그의 봉사활동의 베이스에는 은파선교회, 그리고 아버지 정수진 씨가 있다.

"실은 이 모든 일은 아버님께서 시작하셨던 일입니다. 70년대부터 교도소를 나와 갈 곳이 없는 분들을 돕기 시작하셨거든요. 지금 돌아가신 지 꼭 십 년이네요. 은혜 '은'자에 파도 '파', 아버님의 호였던 은파라는 이름을 딴 것이 바로 은파선교회이며 돌아가시면서 지금의 은파빌딩까지 내놓으셨죠. 아버님은 정말 의미 있는 생애를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1975년에 창립하고 1999년 사단법인체가 된 은파선교회는 사회 소외계층의 지원 및 후원을 통해 사회 복지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단체다. 매월 장애인이나 노약자기관을 후원하고 국내외 무의촌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유진벨'을 통해 북한 결핵환자의 치료약을 공급하기도 했다. 30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말 그대로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드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

정 원장은 아버지에게서 봉사의 기쁨을 배웠고, 아버지가 생각하고 추진했던 바를 대물림할 수 있도록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의술이었다.

"의료는 모든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모든 사람들은 건강에 관심이 있으니 말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미적 감각을 구현하기 위한 가장 좋은 과가 바로 성형외과더군요."

수 차례 개인전을 열었을 정도로 미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정 원장은 성형외과가 비록 미용성형에만 치우쳐 있는 현실이지만, 재건과 회복의 개념에서 봤을 때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주 중요한 분야가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요즘엔 환자들과 상담하면서 마음의 성형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쓸 데 없는 성형은 권하질 않고 돌려보내거든요. 제가 좀 말이 많은 편이죠? 하하."

정 원장은 보령의료봉사상을 탈 만큼 큰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인터뷰를 통해 나눔의 동참을 촉구하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며 소감을 전했다. 2010년에는 은파선교회원 1000명 돌파라는 원대한(?) 포부를 밝힌 정해광 원장. 박학다식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그는 '행복의 진정한 의미는 돈도 권력도 아니라 바로 더불어 사는 삶'이라고 강조했다.

"은연중에 돈과 지위가 행복의 척도가 되는 교육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69억 인구 중에 3억 4000만 인구가 배가 고파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죠. 봉사 현장에 나가면 아이들은 돈이 아니라 사랑의 눈빛을 찾습니다. 그만큼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이 없거든요."

부창부수라고 음악을 전공했지만 남편의 뜻에 적극 동참해 함께 네팔 등의 오지에서 성실한 약사로 활동해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인터뷰는 마무리됐다. 경기 탓에 유난히 차갑게만 느껴질 올 겨울 정 원장이 전하는 나눔 바이러스가 더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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