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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거만과 순종 (상)
황제의 거만과 순종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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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8.1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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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비드 작.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1806~1807) 루브르미술관 소장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에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나 1821년 5월 5일에 세인트 헬에나 섬에서 사망할 때까지 51년간 군인으로, 황제로 그리고 유배인 으로 파랑 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프랑스 혁명을 타고 등장한 그는 국내 정치를 정돈하고 근대법의 모간이 되는 나폴레옹 법전을 만들고, 개선문을 건립하여 프랑스의 내용 외관(內容外觀)은 나폴레옹에 의해 구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가 황제로 등장하면서 대관식을 올렸는데 그때 그의 거만은 평생의 극에 달했으며 그것을 그림으로 한 것이 있으며 또 그는 의사를 평소에 믿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 당시의 의학이 그가 믿을 만큼 발달되지 못해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만성적인 위통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는 손을 들어 명치끝에다 올려놓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도 도도했던 황제도 병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은 것으로 이러한 나폴레옹 포즈를 취한 그림이 있어 두 그림을 보면서 황제의 거만과 순종을 살펴보기로 한다.

프랑스의 화가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6)는 화가이면서도 자코뱅 당의 당원으로 프랑스 혁명에도 적극 가담하였으며 혁명 후에는 나폴레옹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어 나폴레옹과 관계되는 그림을 많이 그려 더욱 유명해진 화가이다.

루브르 미술관을 찾는 관객들이 가장 많이 모여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미케랑제로의 '모나리자'이고 그 다음이 다비드의 작품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1806-07)이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 그리고 몰락이라는 역사적인 사실보다도 다비드의 작품에 매혹되어서 일 것이다.

가로 10m의 화면 크기는 우선 그 크기로서 관객을 압도한다. 또 그 완벽하게 짜임 세 있는 구성과 섬세한 빛의 효과 그리고 극적인 긴장감 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우선 나폴레옹이 쓰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왕관이 아니라 월계관인데 이것은 나폴레옹이 로마의 황제와 동일시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파리의 화려함 위에 로마의 장엄함을 더하려 했는데 이런 생각은 나폴레옹만이 아니라 히틀러도 그러했다. 즉 유럽의 정복자들은 모두가 미적인 면에서는 로마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나폴레옹이 로마의 영광을 되살리려 했던 그의 의도를 잘 아는  화가였으므로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았으며 다비드의 그림 속에 나폴레옹을 언제나 신적인 존재로 둔갑된 이미지로 부각시키곤 했다.

대관식은 1804년 12월 2일에 거행되었는데 왕관의 제관은 교황 비오 7세가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동안 교황청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폴레옹이 대관식의 주제를 의뢰하자 화해의 제의로 받아들여 쾌히 승낙하였다.

그러나 막상 대관식 날 교황이 관을 씌우려 하자 나폴레옹은 관을 받아들고는 돌아서서 자기가 스스로의 머리에 월계관을 썼다. 그리고는 조세핀의 머리 위에 자신이 직접 황후의 관을 씌워 주어 교황은 완전히 허수아비로 만든 거만을 떨었다. 이 그림은 나폴레옹의 생애의 최대의 거만스러운 모습을 담은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문국진(고려대 명예교수·학술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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