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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서의 ~인생 2막 이야기

울릉도에서의 ~인생 2막 이야기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8.07.3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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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 (전 울릉도 보건의료원장)

이라크 전쟁 직후 아비규환의 그곳을 '의료봉사단장'이라는 이름으로 서슴없이 찾았던 의사. 그리고 아무도 원치 않았던 울릉도 보건의료원장을 흔쾌히 맡아 했던 의사. 바로 보령의료봉사상 올해의 네 번째 수상자 정만진 원장이다.
정만진 원장은 그의 인생 1막과 2막을 지나왔고 이제 제3막을 시작하며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을 경험하고 있다. '유심(唯心)'이라는 필명으로 수필을 쓰고 있기도 한 정만진 원장은 말한다.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 의료봉사활동 단장으로 강의를 하고 있는 정만진 원장.
이라크에서의 경험, 그리고 인생 2막의 시작
"두바이에서 요르단, 암만을 거쳐 바그다드까지 사막을 건넜습니다. 현대건설이 만든 사막의 길을 따라갔던 일이 아련하게 떠오르네요. 우린 육로를 통해야 했고 많은 약탈자들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땐 다들 떠나는 나를 보고는 죽으러 가는 것처럼 얘기했는데,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죠.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거고, 살라 치면 산다. 거기서 죽어도 나라에서 장례 치러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이냐 하면서."

총소리도 나고, 약탈자들도 많았던 그때 그곳. 의료봉사단장으로 먼저 진료환경이나 그 곳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한 선발대로 파견됐을 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정만진 원장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되뇌이며 용기를 냈다. 실제로 전후의 이라크를 둘러본 짧은 경험은 이제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됐으며 울릉도 보건의료원장으로 자원하게 된 데도 큰 몫을 했다.

"안식년을 생각했고, 짧은 시간이나마 이라크를 다녀온 기억을 더듬었지요. 친구가 2년간 의료 봉사를 다녀온 아프리카를 생각했지만, 나이와 현실, 떨쳐버리기에는 아깝고 질긴 인간의 연(緣)에 얽매여 지나왔습니다. 그런데 문득 아프리카보단 가깝고 이라크보단 위험하지 않은 울릉도가 나에게 유혹의 손짓을 하더군요."

불확실한 미래와 갑작스런 생활환경의 변화를 감수하는 것에 대해 고민도 많았다. 하지만 2004년 6월 1일 정만진 원장은 고향 영천을 홀홀단신 떠나와 울릉도인이 됐고, 인생의 2막, 제2의 고향을 찾았다.

"욕심은 많을수록 불행해지고, 나눔은 많을수록 행복해집니다. 더불어 살면서 스스로 사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봉사는 사실 대학교 때부터였다. 의료 행위가 아닌 복조리를 팔아서 번 돈으로 고아원을 도왔던 것을 시작으로 개원 후에는 신체검사를 할 여력이 없는 오지의 학교를 돌면서 봉사활동을 해왔다. 영천 로터리클럽 회장을 맡으면서 비로소 독거노인이나 장애인들을 위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봉사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녹록치 않았던 섬살이 4년
"맑고 푸른 동해바다 신록이 무르익는 평화로운 울릉도에, 태풍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이 있다는 사실은 상상하기 힘들었습니다. 울릉도에서의 섬살이가 그렇게 녹록한 건 아니었지요. 격랑이 있는 날 배를 타고 들어오면 위산까지 토해내는 멀미를 해야 했고, 초보 공무원으로 적응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어요."

보건의료원은 울릉도의 유일한 의료기관이다. 10개의 진료과와 2개의 보건지소, 그리고 3개의 보건진료소로 구성됐고 공중보건의들로 구성된 의료진을 포함해 8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아무래도 섬이다보니 뇌출혈이나 심근경색 같은 응급 환자가 생겼을 때 가장 긴장하게 된다. 기상이 나빠 헬기도 경비정도 뜰 수 없으면 환자는 물론 의료원의 진료진들도 애가 타기는 마찬가지.

"그래서 내가 만든 말이 있어요, 인명재천(人名在天)이 아니라 인명재(人名在)헬기라고. 지금은 해양경찰과 해군의 도움을 받아 헬기로 응급환자를 후송합니다. 연평균 25건 정도 있는 일인데, 우리들에게는 그저 업무의 연장일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본인들에게는 평생에 단 한번 생명을 건 중대사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한밤중에라도 꼭 나가서 헬기가 무사히 뜰 때까지 지켜보곤 했죠."

정만진 원장은 울릉도에서의 또 다른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2005년 가천의대 길병원과 조선일보가 공동으로 65세 이상의 적당한 환자를 무료수술해주겠으니 추천을 달라는 전화 한 통을 받게 됐다. 마땅한 사람을 물색하던 중, 40대 후반의 혼자 사는 앉은뱅이 환자를 찾아냈다. 3년 넘게 앉은뱅이로 살았지만 인공고관절 치환 수술만 하면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빈곤한 삶을 살고 있는 의료보호 대상이었지만 65세 이상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때부터 가천의대 담당자를 설득하고 무료 승선을 주선하는 등의 노력은 온건히 정만진 원장의 몫이었다. 일단 그 환자를 알게 된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까닭이다. 결국 천만 원이 넘는 수술이 집행됐고 환자는 걸을 수 있게 됐다. 앉은뱅이 3년 만에 걸을 수 있게 된 기쁨은 설득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의 기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속는 셈 치고 한달만 해보십시오
"울릉도에서 지루하게 어떻게 살았냐고들 물어보시는 분이 계신데,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거든요. KBS 라디오 건강 방송을 했고, 학교나 군부대·경찰·교회·경로당 할 것 없이 매년 70여 회 건강 강연을 했습니다. 꼭 진료만 봐야 의료봉사인가요, 울릉도에서 건강 관련 교육이 절실하답니다."

정만진 원장이 만들어낸 신조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활동하며 100세까지', 혹은 일주일에 5일, 30분 동안 운동하자는 의미의 '530운동' 등이 그것. 건강 방송을 위해서 5시간씩 자료를 뒤졌고, 건강 강연을 위해서 직접 발로 뛰며 거리를 재고 시간을 계산해서 데이터를 모으고 사진을 찍었으며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위해 파워포인트를 공부했다. 정만진 원장의 파워포인트 주요 공략법은 그 누구보다 쉽게 만드는 것.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혹은 나이가 많은 지역주민을 위한 배려다.

"공무원이라고 시키는 일만 할 수는 없잖아요,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일을 해야지. 할머니들은 어렵게 강의해봐야 못 알아듣거든요. 같이 걷고 두세 번 반복하고 걸으면 오래 살아요! 얼마나? 속옷 땀나는 정도로 하세요. 일주일에 5일 하루 30분씩 속는 셈 치고 한달만 해보십시오, 그리 설득하면서 같이 걸어 다녔어요."

실제로 울릉도에서는 저녁때쯤 학교 운동장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와 삼삼오오 걷기 운동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새로운 인생 3막을 기대하며
정만진 원장은 6월 30일 공무원 정년퇴임을 하고 제2의 고향을 떠나와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며 인생 3막의 스케줄을 만들고 있다. 의사의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지내온 세월을 돌아보며 젊은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의사를 구하는 공고는 계속 올라오고 있는데. 젊은 친구들이 좀 더 시야를 넓게 가지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의사들이 NATO(no action think only), 즉 안주하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직업군보다도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는데도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라며 쓴 소리를 마다 않는 정만진 원장의 모습에 의사사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모든 것을 버리지는 못하더라도 조금만 양보한다면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봉사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며 지어보이는 행복한 미소. 연륜이 묻어나는 그 웃음에서 또 다른 희망을 본다.

"제 인생 3막은 분명 봉사를 위한 시간이 있을 겁니다. 저 사람이 이번에는 또 무엇을 할까 하고 관심 가져 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변함없을 겁니다."

일본의 독도 관련 망언이 한창 이슈이던 터에 정만진 원장이 "독도에 10가구 정도만 살게 되면 독도의원을 개설하는 것도 꿈만은 아닐 것 같다"며 운을 뗀다. 국민들의 흥분보다는 국가적인 지원과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진중함, 그의 인생 3막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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