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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9 15:21 (금)
절대원음 전도사 국내 첫 진공관 앰프 전시회 주인공∼
절대원음 전도사 국내 첫 진공관 앰프 전시회 주인공∼
  • 이현식 기자 hslee03@kma.org
  • 승인 2008.03.3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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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진 원장

1987년 5월 전구의 열을 통해 아날로그 사운드를 내는 '진공관 앰프 시청회'가 국내 최초로 열렸다. 산부인과 진료를 하는 의사이자 진공관 앰프를 손수 제작하는 김호진 원장의 '예술작품'을 보기 위해 많은 매니아들이 몰려들었다.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진공관 앰프 시청회를 개최한 인물은 김호진 원장이 유일하다. 김 원장은 이듬해까지 서울에서 2번, 광주와 전주에서 각각 한번씩 시청회를 열었다.

"1988년 12월 서울 강남 오디오프라자에서 네번째 시청회를 열었을 때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왔어요. 진공관을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나를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진공관 앰프 제작에는 많은 비용이 든다. 요즘 괜찮은 진공관 앰프 하나를 제작하려면 500만원 이상 소요된다. 보통 진공관 앰프를 만드는 사람들은 종류를 달리 해서 수십개를 만들기 때문에 제작비를 감당하기조차 어렵다. 그런데 20년 전에 시청회를 열었으니 한 마디로 사건이랄 만하다.

진공관 앰프에 생소한 기자가 소리가 나오는 원리를 물었다. 전구 속에서 고열이 생기면 전자가 튀어서 옮겨주는 작용을 한다고 했다. "진공관 앰프의 소리는 매우 자연스러워요. CD 앰프에서 나는 인공적인 맛과는 완전히 다르죠. 똑같은 회로와 부품을 사용하더라도 누가 만들었느냐에 따라 소리가 다릅니다. 반면 다른 출력관이라도 한 사람이 만들면 소리가 똑같게 느껴지죠."

1930년생인 김 원장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하던 아버지 슬하에서 진공관 앰프를 접하며 성장했다. 당시에는 모든 앰프가 진공관 방식이었다. 10대 후반 때 진공관 앰프 30가지 이상을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으니 60년을 진공관과 함께 살아왔다.

"당시 5극관 앰프는 소출력용으로는 사용할 만했지만 클래식 음악을 듣기에는 부적절했어요. 그래서 직렬 3극관 앰프를 만들었죠." 그의 나이 28세 때의 일이다. 당시 중앙일보사가 발행한 계간 전문지 <STEREO MUSIC> 1993년 11월호는 김 원장을 머릿기사로 소개하면서 '직렬 3극관의 바람을 몰고 왔던 절대 원음의 전도사'라고 극찬했다. 한번 직렬 3극관 앰프로 음악을 들으면 다른 앰프에 손대지 않는 사람들이 늘면서 직렬 3극관이 진공관 앰프의 보편적인 형태로 자리잡았다.

"1970년대에 의료보험이 생기고 나니 병원을 운영할 의욕이 없어지더군요. 그래서 더욱 진공관 앰프에 매달렸어요." 시청회와 잡지를 통해 유명세를 타면서 웃지 못할 사건도 많았다. 그의 아내 정경희 씨는 "그때 대단했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진공관 앰프를 보겠다고 우리 집에 와서 며칠씩 먹고 자고 했어요. 그중에는 말도 없이 전구를 슬쩍 가져가는 사람도 있었고, 앰프를 몰래 들고가는 바람에 택시 타고 따라가서 다시 받아온 경우도 있었죠."

국경도 없었다. 사또시라는 일본인은 김 원장의 집을 네다섯번 왔는데, 한번 오면 일주일씩 묵으면서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오디오 얘기만 하는 바람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고.

"이전에 일본 오디오부품 가게 밀집지역인 아끼하바라에 가서 진공관 앰프를 구입했는데, 귀국하면서 세관에서 잡혔어요. '왜 똑같은 것을 두개나 가져오느냐'고 묻더군요. 차이점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를 못해 혼났어요(웃음)."

그의 집 서재에는 LP판 4800장이 가지런히 정렬돼 있다. 그 중에는 바로크 이전 음악 등 희귀판도 많다. "진공관 앰프는 제작하는 재미와 음악을 듣는 재미가 반반이라고 할 수 있어요. 클래식 음악은 혼자 들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죠. 만드는 것만 좋아하는 경우도 있는데, 음악을 모르고 진공관만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염가의 진공관을 갖더라도 LP는 많이 가지고 있는 게 낫죠."

밑도 끝도 없이 진공관 앰프에 매달려 막대한 시간과 돈을 쓰면서 아내와 많이 다투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을 이해해주고 격려해준 아내에게 마음으로부터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김 원장은 말했다.

에필로그…

김호진 회원님과의 인터뷰는 3월 15일 전남 무안군 자택에서 진행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후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종합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으시다가 지난 23일 운명하셨습니다. 병상에 계시면서 의협신문에 나올 기사를 보고 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본지는 고인과 유족의 의견을 존중하여 예정대로 기사를 게재합니다. 고인의 영전에 이 기사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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