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소법 개정안 등 악법 저지…'의협신보' 첫 발
보건소법 개정안 등 악법 저지…'의협신보' 첫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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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2.3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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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 100년... 질곡을 넘어 새 시대로]
▲ 1967년 2월 열린 의협신보사 현판식. 당시 명주완 회장이 현판을 달고 있다.

사회적 책무 인식…의사윤리 채택(1960)

1960년 9월 의사윤리가 채택돼 의협대의원총회에서 낭독되기 시작했다. 이 때의 의사윤리는 세계의사회(WMA)의 의사윤리를 번역한 수준이었지만 전문가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한편 2년 뒤인 1962년 4월 25일에는 의협 내에 의료윤리위원회가 처음 구성됐다.

종합학술대회 면모 일신(1961)

1961년 10월 14∼15일 제13차 학술대회부터 학술모임의 면모가 일신된다. 학술대회 논문 발표외에도 학술상 시상·특별강연과 숙제보고가 발표되고 산하 분과학회가 함께 참가했는데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축사를 했으며, 의사윤리가 처음 낭독됐다. 대통령상·최고회의의장상 등을 수여, 국정 최고책임자가 직접 연구의욕을 고취시켰다. 오늘날과 같은 종합학술대회는 1971년부터 시작됐다.

첫 의사정기신고…의사회 육성 발판(1962)

1962년 3월 20일 국민의료법이 전면 폐기되고 새 의료법이 제정된다. 새 의료법에는 의료기관 개설 허가제·전문과목 표방제·지정업무 종사 명령의 이행·의사 연수교육 의무화 등이 명시됐는데 이 중에서도 제17조 제5항에 '의사는 각령으로 정하는 바에 의하여 매년 그 실태와 취업상황 등을 보사부 장관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시행령 제10조에 매년 5월 중에 신고토록 하면서 회원 실태 파악과 회비 징수에 어려움을 겪어오던 의협은 큰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새 의료법에 따라 1962년 5월 1일 처음으로 의사정기신고가 실시돼 전국 의사회원 실태를 파악하게 되는데 이로써 이전까지 30% 정도에 머물던 회비납부율이 100%를 달성하게 된다.

의료보험법 제정·공포(1963)

1963년 12월 의료보험법이 제정·공포되자 의협은 1964년 5월 의료보험연구위원회를 가동하고 같은해 10월 종합학술대회에 일본의사회장을 초청에 '일본의 의료보험제도'주제의 특강을 마련하는 등 의료보험을 현안으로 다루게 된다. 1965년 의료보험시범사업이 시작되자 1966년 1월 임총을 열어 의료보험위원회를 상설화하는 정관개정을 하고, 같은 해 6월 의료보험위원회를 구성함으로써 다가올 의료보험시대에 본격적인 대비에 들어간다.

2개 악법 막아내다(1967)

1965년 1월 침사·구사·접골사·안마사 제도화를 위한 의사의료법안이 국회에 제안 됐으며 같은 해 11월 의사가 아닌 공무원을 보건소장에 임용케 하려는 보건소법개정안 발의로 의료계는 들끓게 된다. 1965년 12월 7일 국회 보건사회위원회에서 두 개 법안이  전격 통과돼 국회 본회의에 회부되는 등 법 시행이 기정사실화되는 듯 했다. 의협은 1966년 1월 14일과 국회 본회의 회부 직후인 7월 5일, 9월 30일 등 3차례 임총을 열어 강력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7월5일 소집된 임총에서는 '저지투쟁위원회'를 구성했으며 당일 국회의사장까지 가두시위를 벌이고 7월 5일 임총에서는 1인당 500원씩 특별회비 모금을 결의했으니 의권투쟁의 효시격인 셈이다. 1967년 1월 16일에는 5000여명의 개원 회원이 연판장과 청원문을 대통령·국회의장에 제출하는 등 의협을 중심으로 한 지속적인 노력에 힘입어 1967년 4월 1일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 자동폐기됐다.  

정론의 길…'의협신보' 창간(1967)

의협은 1966년 4월 17일 광주총회에서 기관지 발간을 결의한다. 당시 이미 의사신문을 발간하고 있던  서울시의사회와  첨예한 갈등을 빚게 돼 의협 회비 납부 거부 운동까지 벌이는 등  2년여 동안 불편한 관계에 놓였으나 창간 결의 11개월만인 1967년 3월 21일 역사적 창간에 이르게 된다. 산고 끝에 태어난 의협신보(현 의협신문)는 의료계 움직임과 정부의 주요 정책 등을 발로 뛰어 보도해 당시 1만여 회원의 눈과 귀·입이 되면서 의협 회무 및  역사에 또하나의 토대를 마련한다.

의협 창립 사료 발굴 역사 되찾다(1968)

1967년까지 의협의 공식 창립연도는 조선의학협회의 창립일인 47년 5월10일로 이날을 기념해왔다. 그러나 1967년 10월10일 상임이사회에서 창립연도 검토에 대한 의견이 나왔다. 이사회에서는 9인 자문위를 만들어 역사를 추적했으며 1968년 2월 일제치하에서 순수하게 한국의사만이 주축이 돼 활동한 의사연구회의 존재를 발굴해냈다. 의사연구회의 창립은 1908년 11월 6일이나 임원을 선출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11월 15일을 창립일로 정하고, 이를 소급해 당시 60주년를 기념하면서 창립일로 굳어졌다.

정치세력화 초석 '대한의정회' 창립(1969)

일본의사연맹의 대외활동에 착안, 명주완 회장 때인 1969년 12월 26일 100여명의 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가톨릭의대 강당에서 발기준비위원회를 개최하고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후 1970년 1월 5일 1차 회의부터 본격적인 창립준비에 들어가 4월 29일 춘천에서 열린 의협 정기총회에서 역사적인 창립(초대 회장 이중설)에 이르게 된다. 의정회는 창간취지문에서 의협의 방계단체로 비여비야(非與非野)의 정치기능단체를 표방, 37여년간 의협의 대외활동을 지원해왔으나 지난해 4월 발생한 국회 금품로비 파문으로 폐지됐다. 그러나 의정회의 활동은 지난해 11월 15일 출범한 대외사업추진본부가 이어가고 있다.

회원정기신고 협회 경유 폐지(1971)

1971년 8월 20일 당시 보사부는 의사회원이 정기신고를 할 때 의협을 경유하는 원칙을 폐지했다. 정부는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에 담긴 의료인 정기신고 서식에서 '중앙회 경유'란을 삭제했다. 당시 보사부는 "단체의 자율적인 육성 및 민원업무의 간소화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했지만, 의협의 강한 반발을 샀다. 서울시 역시 "민주행정의 정도가 아니다"며 "개정안을 철회하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1971년 정기신고결과 의사는 62.53%가 신고를 마친 것으로 나와 의적부를 대폭 정리해야 한다는 의료계 요구가 거셌다. 의협은 "협회 경유 절차를 폐지해도 의사의 신고율은 별 차이가 없는데 빈대 한 마리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불태우는 시책을 폈다"고 반발했다.

국제행사 주역 부상…시마오 서울총회(1971)

1971년 10월 13∼15일 조선호텔에서 열린 제7차 아시아대양주의학협회연맹 총회에는 세계 각국에서 400여명이 참석했다.

대한의사협회는 1971년 제7차 아시아대양주의학협회연맹(CMAAO·시마오) 총회를 서울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국제 의학계에 한국의학계의 가능성을 알렸다. 이 해 10월 13~15일 조선호텔에서 열린 시마오 서울총회는 2년동안 의협과 정부가 함께 준비한 '한국 의학계의 자존심'이었다. 1961년 시마오 정회원으로 가입한 의협은 1969년 시마오 총회 유치에 성공한다. 의협은 정부의 국고보조금을 지원받는데도 성공, 첫 시마오 서울총회를 4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었다. 67년 세계 최초로 간이식 수술을 한 토마스 스타즐 미 콜로라도의대 교수를 비롯해 1964년도 노벨의학상 수상자인 페도르 리넨 당시 서독 뮌헨대학 교수 등이 참석해 이목을 받기도 했다.

10년 뒤인 1981년 두 번째 시마오 서울총회를 개최할 수 있었던 힘도 이때 쌓인 신뢰가 밑바탕이 됐다. 1981년 9월 14일 열린 제12차 서울총회는 의협이 국제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역량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때 총회에서 문태준 의협회장이 제15대 시마오 회장에 취임했다.

전문의 자격시험 의협 이관(1973)

국립보건연구원에서 주관하던 전문의자격시험 업무가 1973년 의협에 이관됐다. 전문의료인 양성의 주도권을 의협이 갖게돼 의협이 공신력이 높아지게 된 변화였다.

1952년 전문의제도가 도입된 이후 7년간은 서류심사만으로 전문의를 뽑는 방식이었다. 이후 1959년부터 자격시험을 통해 전문의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1964년 전문의 수련병원 인정제도를 채택하면서 의협이 매년 수련병원 운영실태를 조사하도록 했다가 이를 병협에 이관시키면서 의협은 1973년부터 전문의자격시험업무를 맡도록 했다.

이에 따라 그해 2월 13일 열린 제15회 전문의자격시험부터 의협이 주관하기 시작했다. 이는 우리나라 국가시험사상 자격시험을 민간단체가 주관한 최초사례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이 해 첫 시험의 성공 여부에 따라 의협의 공신력이 판가름나는 것은 물론, 다른 단체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의협은 시험출제에서부터 보안까지 성공적으로 시험을 주관했으며, 그 해 6월 합격자 369명에게 합격증을 발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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