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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이 세상의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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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1.2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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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회원(전주예수병원장)

<김민철 회원>

이름

김민철

소속

전주예수병원장

경력

1980

전북의대 졸업

 

1984

예수병원 내과 전공의 과정 수료

 

1987~2000

예수병원 신장내과장/혈액종양내과장

 

1996~1998

예수병원 부설 기독의학연구원장

 

1998~1999

예수병원 기획조정실장

 

1999~2001

캐나다 ACTS 신학대학원 기독교학·선교학 수학

 

2000~2004

나이지리아 엑베 병원 근무

 

2004~

예수병원장

 

"닮고 싶은 인생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신 분"
박상은 회원(샘안양병원)
살아가면서 닮고 싶은 삶을 살아내고 계신 분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김민철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제가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말로만 강조하는 사람이라면, 김민철 선생님은 말뿐 아니라 몸소 실천하고 계시지요.
르완다 난민사태가 일어났을 때 모든 하던 일을 멈추고 훌쩍 의료봉사를 떠나셨는가 하면, 나이지리아에서는 3년이 넘도록 봉사에 매진하셨습니다. 에이즈 환자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 예방사업에 젊은 시절을 바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에는 전주에 있는 예수병원을 부흥시키는 역할을 맡아, 새 지휘자로서 병원 살리기에 팔을 걷어 붙였습니다. 덕분에 김 선생님이 병원장을 맡으신 이후 병원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는군요.
김민철 선생님 같은 분이 이 코너에 나와야 '아! 드디어 나올 사람이 나오는구나' 싶을 겁니다. 김 선생님이야말로 진정한 칭찬릴레이 주인공이십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김민철 원장과 산부인과 의사인 그의 아내.

'나이지리아 한국인 또 피습'

일주일이 멀다하고 나이지리아에서 무장단체의 피습을 받은 한국 근로자들의 소식이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쯤되면 아무리 세계화가 성큼 다가왔다지만 지구촌 한가족은 아직 요원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저러다가 더 큰 사고가 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된다.

"나이지리아는 언어와 문화가 다른 470여종족이 한 나라에 모여 살고 있으니, 불화와 다툼이 끊이질 않아요. 특히 해가 진 후에 밖에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합니다. 병원에서 67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를 만나기 위해 해지기 전에 닿으려고 해가 뜨기 무섭게 부지런히 길을 떠났던 기억이 나네요."

김민철 원장에게는 머나먼 나이지리아 소식이 남 이야기 같지가 않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3년동안 그는 나이지리아 수도에서 300여km나 떨어진 오지의 엑베 병원에서 봉사했다. 그곳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면서 함께 아파하고 기뻐했던 그는 아프리카에 뼈를 묻겠다고 결심했다. 수없이 위험천만한 순간을 넘겼건만 그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할 일이 정말 많아요. 단순히 병원에 앉아 찾아오는 환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직접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아픈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진료의사가 되어야 하고, 때로는 에이즈 예방활동을 벌이는 보건전문가가 되어야 하죠. 어떨 때는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알파벳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기도 하고요."

사실 아프리카와 김민철 원장의 인연은 그가 나이지리아를 방문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자, 삶의 표본이 된 설대위 박사 덕분이다. 설대위 박사는 6·25 직후인 1954년 의료선교를 위해 한국에 와 1990년 은퇴 후 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암환자 등록사업을 시작하고 농촌보건사업을 실시하는 등 전주예수병원에서 봉사한 미국 의사.

"설대위 원장님의 책을 번역하고 있을 때였어요. 뉴스에서 르완다 난민 수만 명이 콜레라로 죽어가고 있다는 모습을 보았는데, 때마침 설 원장님의 책 속에서 콜레라로 전북 지역에서만 1만명의 생명을 앗아가던 시절 한국 아이들을 치료하던 대목이 나왔습니다. 내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실제로 설 원장님이 원래는 아프리카로 떠나시려다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으로 발길을 돌리셨기도 하고요."

그렇게 르완다로 떠났던 김 원장은 3개월 동안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아프리카 생활에서 인생의 계획을 새로 짰다. 전쟁과 일제로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한국땅을 밟아,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바쳤던 선교사들의 삶을 쫓기로 했던 것이다. 초등학생·중학생 두 아이와 한창 개원가에서 주가를 올리던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도 흔쾌히 그의 뜻을 따라주었다.

그런데,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사람일이라고 했던가. 안식년 동안 캐나다에서 좀더 공부를 하다가 나이지리아 의과대학에서 수련과정을 진행하리라 마음 먹었던 그에게 뜻하지 않던 제안이 들어왔다. 한국에서 예수병원을 맡아달라는 급한 연락이 왔던 것.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예수병원이 문을 닫게 된다면 그 옛날 선교사들이 힘들게 병원을 세운 뜻과 의미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 몸이 어디에 있든지 본질을 잊지 않고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결국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2004년 병원장이 된 그의 앞에는 환자수가 급격히 줄고 몇 개월째 임금체불이 지속되는 등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있는 병원을 구하라는 중책이 놓여져 있었다. 병원 경영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는 김 원장에게 한국 지역 중소병원의 현실은 틀림없이 엄청난 도전이었을 테지만, 병원으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임금 감봉이나 구조조정이 아닌, 외국인노동자 무료진료·해외 의료봉사활동 확대 등 오히려 밝고 훈훈한 소식들이었다.

"어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수지타산과 병원 설립 목적을 두고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왜 예수병원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면 금방 문제가 해결됩니다. 또 힘들때일수록 직원들이 희생을 감내하며 더욱 열심히 일하고, 외국인노동자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기금 마련에 적극 참여해주어 2년이 지난 지금 예전보다 훨씬 상황이 나아졌어요."

큰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해있는 동안 거지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던 또래 아이를 보면서,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도 치료해주고 어려운 사람들도 도와주겠다고 마음먹었던 아이. 그 아이가 자라서 상처받은 세상을 치유하는 의사가 됐다. 해맑은 그의 미소에서  "모든 환자를 예수님처럼 대하라"고 강조했던, 그가 존경해 마지 않는 설대위 원장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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