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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10%가 삶을 바꾸다

인생의 10%가 삶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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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1.0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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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순 회원(경기 수동요양병원 정형외과장)

<윤치순 회원>

이름

윤치순(69)

소속

경기 수동요양병원 정형외과장

경력

1965

가톨릭의대 졸업

 

1974

가톨릭대성모병원 정형외과 전공의 과정 수료

 

1974~1978

순천향병원 정형외과 근무

 

1984~1999

북인천정형외과의원 개원

 

1999~2006

몽골 연세친선병원 정형외과 근무

 

2006~

수동요양병원 정형외과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의사"
박진용 회원(연세의료원 의료선교센터)
1999년부터 2006년까지 몽골 연세친선병원에서 일한 윤치순 선생님은 칠순을 바라보고 있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환자를 돌보는 의사입니다.
몽골 병원에는 정형외과 시술을 할 수 있는 기구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지만 탄력붕대가 없을 때는 헌 옷을 정성껏 잘라서, 목발이 없을 때는 목수를 불러 맞춤 목발을 만들어서 쓰곤 하셨죠.
특히 몽골은 한겨울에 영하 40도까지 내려가기 때문에 동상 환자가 유난히 많아 윤 선생님은 하루에도 몇 번 씩 절단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동상으로 괴사된 조직에서 고름을 짜내고 닦아주는 일을 마다 않는 모습에 다른 나라에서 온 선교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또 윤 선생님은 몽골에서 자상하고 설명을 잘해주는 한국 의사로 소문이 나 있었어요. 손가락이 여섯 개였던 소녀의 손을 수술해주면서 "너도 이제 벙어리 장갑 대신 손가락 장갑을 낄 수 있게 됐구나. 걸어 다닐 때 손을 마음껏 휘저으면서 다닐 수도 있어"라며 따뜻한 말 한마디를 잊지 않으셨지요.
▲ 몽골 연세친선병원에서 윤치순 선생이 치료한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와 함께.

펜과 수첩, 녹음기, 사진기 따위는 애초부터 필요가 없었다. 윤치순 선생과 세 시간에 걸쳐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진행했던 이번 인터뷰는, 인터뷰라기보다는 일상적인 만남이나 대화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윤치순 선생은 이번 만남이 성사되기 훨씬 이전부터 한사코 만남을 꺼리며 기자의 애를 태웠고, 급기야는 어렵사리 만남이 이뤄진 당일에조차 자신은 인터뷰를 하고자 나온 것이 아니라고 누차 선을 그었더랬다.

그래서, 일반적인 인터뷰를 포기했다. 까짓껏 여기까지 왔는데 어디 얘기나 한 번 들어보자는 오기가 발동했기도 하거니와, 인터뷰라면 못해서 안달난 부류와 차별화되는 그가 오히려 순수해보였달까.

"몽골에서 완전히 짐을 싸서 돌아온 게 올 4월께니까 한국에 온 지 한 8개월쯤 됐나. 7년이란 세월동안 참 많이 변했더이다. 사람들이 그 열악한 환경을 잘 견디고 큰일했다고 날 자꾸 추켜세우는데, 정작 난 한국오니까 또 좋더라고요. 먼지 바람 없지, 집 안에서 샤워도 할 수 있고, 양고기 노린내 안 맡아도 되고 말이야."

무덤덤히 내뱉은 그의 말 속에서 몽골 생활을 어렴풋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7년여의 세월을 몇 시간만에 응축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만, 그는 긴긴 세월을 단 몇 마디로 토해냈다.

"70평생 중 10%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내 삶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은 듯한 느낌이에요. 젊을 때는 돈과 명예가 인생의 목표였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에 연연하지 않게 됐죠. 세상 사람들이 '좋은 의사'와 '악덕 의사'를 구분한다면, 비로소 나는 보통 의사가 됐달까."

수지타산이 안 맞아 부평에 냈던 병원을 접은 1999년은 그에게 유난히 의미가 있는 해였다. 60이 된 그가 차츰 죽음을 준비해야겠다고 결심을 한 뒤 세상에 진 빚을 갚을 길을 찾다가 몽골로 떠난 해이다. 아무런 연고 없이 홀홀 단신으로 고생할 각오를 하고 찾았던 그곳은 유목 생활과 추운 기후 탓에 낙마 사고나 동상 환자가 많아 마침 정형외과 의사를 절실하게 원했던 곳이다.

"몽골에는 채식을 할 기회가 없다보니 비타민 결핍으로 다리가 굽은 사람이 많아요. 어느날 다리가 심하게 굽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가 왔는데, 비타민을 구해서 1년동안 먹였는데도 좀체 나아지질 않는 거에요. 한 3년쯤 지났을까. 차를 타고 어떤 동네를 지나가는데, 그 아이가 친구들과 공을 차고 있는 모습을 봤죠. 얼마나 기쁘고 뿌듯했던지. 낙심하고 절망할 때마다 그 아이를 생각하면 힘이 나요."

몽골에 정착한 지 2~3년 동안은 돈과 기술이 없어 치료하지 못했던 환자들을 보면서 기쁨과 희열을 느꼈다. 그 뒤로는 의료선교센터 소속 파견 선교사로 임명돼 몽골자선병원과 함께 본격적인 정형외과 수술을 시작했다.

"수액이나 변변한 항생제가 없었기 때문에 온 몸이 썩어가는 동상 환자에 대해 속수무책이었죠. 일주일 동안 상의끝에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어요. 근육주사로 항생제를 놓은 뒤 국소마취 상태에서 다리를 절단하고, 유통기한이 지난 항생제를 모아 수돗물에 섞어 절단부위를 열심히 씻어줬어요. 그렇게 한 30명 수술을 했나? 하나님이 도우셨는지 한 명의 환자에게도 감염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군의관으로 월남전 현장을 누비고 예순 나이에 터키 지진 피해 현장을 가로 질렀던 그에게 몽골은 그리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퇴 후 어머니와 자식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갈 줄 알았던 그의 아내에게는 몽골은 청천벽력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주위에서 다들 말렸죠. 아내는 말 할 것도 없고. 이비인후과 의사인 제 동생도 낭만에 젖어 있냐며 뜯어 말렸지만, 나야 무서울 게 없었지. 처음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아내도 몽골에서 나를 따라다니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주일에 한번씩 장애아를 위한 예배 시간에 맞춰 승합차를 운행하기 위해 1종 운전면허를 땄다. 그의 옆 좌석에 앉는 동생은 집집마다 연락하는 봉사를 자처했다. "이제는 평온하게 죽을 준비를 다 했다"는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이 아니라, '평온한 삶'이었다. 단돈 2000원짜리 콩짜장조차 너무나 맛있는, 모든 일이 즐겁고 여유로운 삶은 윤치순 선생이 보여준 호의에 대해 몽골 사람들의 준 큰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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