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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 희망을 심어준 의사 선교사
몽골에 희망을 심어준 의사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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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12.2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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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용 회원(연세의료원 의료선교센터)

<박진용 회원>

이름

박진용

소속

연세의료원 의료선교센터

경력

1984

연세의대 졸업

 

1985~1995

캐나다 캘거리의과대학 당뇨병연구소 박사후 연구원/선임연구원

 

1995~1998

미국 비올라대학 탈보트 신학대학원

 

1996~1998

미국 사우던캘리포니아대학 생리학 연구원

 

1998~2006

국립몽골의과대학 교수 및 중앙연구실 소장
연세의료원 의료선교센터 몽골 프로젝트 책임자

 

2007~

중국 심양의과대학 근무 예정

 

"몽골로 중국으로 해외 의료선교에 매진하는 의사"
박광수 회원(WHO 솔로몬제도 소장)
사실 저같은 사람보다는 박진용 선생님 같은 분이 칭찬릴레이의 주인공으로 적합한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야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 뿐이지만, 박 선생님이야말로 정말 돈이나 명예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남을 돕기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박진용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전해 들었지만, 정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 지는 얼마되지 않아요. 제가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박 선생님도 오랫동안 몽골에서 생활하시다 올해 초에 한국에 들어오셨거든요.
지난 7년동안 몽골에서 의료선교활동에 매진해 오셨다고 합니다. 알고보니 두 부부가 모두 의사이면서 한마음 한뜻으로 헌신적으로 일해오셨답니다. 미국에 그대로 계셨더라면 지금쯤 별 어려움 없이 살고 계셨을텐데 망설임없이 해외 의료선교활동에 나선 용기가 부럽습니다.
더구나 몽골에서 돌아오셨다길래 이제는 좀 쉬시나 싶었더니 몇 일 후에는 중국으로 떠난다고 하시더군요. 얼마나 있게 될 지 기약할 수 없는 길을 즐겁게 다시 떠날 수 있는 박 선생님 내외가 존경스럽습니다. 모쪼록 건강히 하시고자 하는 일 모두 잘 이루시길 멀리서나마 응원하겠습니다.

 

<박진용 회원을 만났습니다>

'의사 박진용'은 그를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땐 '선교사 박진용'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것도 썩 만족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해외에서 의사로서 일하면서 동시에 선교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그를 '의사 선교사 박진용'이라고 불러보는 건 어떨까? 처음부터 이렇게 썰을 푸는 이유가 있다. 박진용, 하면 모두들 미국에서 잘 나가던 직장을 팽개치고 가족들과 함께 몽골에서 7년동안 의료선교활동에 매진해 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하자면 '선교'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물론 그가 한 이야기에서도 '선교'는 빠지지 않았다.

"1991년이었어요. 기독교에서는 주님을 영접하고 새롭게 거듭났다고 표현하지요. 원래부터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독실한 신자셨던 장인 어른이 갑자기 암 진단을 받는 것을 계기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부터 줄곧 돈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것이 삶의 목표였던 박진용 선생이 삶의 목표를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을 알리는 것으로 바꾼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때부터다. 본격적으로 의료선교를 떠나기 위해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마쳤고, 연을 끊겠다며 극렬하게 반대했던 부모님을 설득해 1998년 몽골 땅을 밟았다.

"몽골의과대학 교수로 발령은 받았지만 원래는 특별히 의대 일에 열중할 계획이 없었어요. 의대는 비자를 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실제로는 선교 활동에 나설 계획이습니다. 하지만 어떤 선교사의 말을 듣고는 마음을 바꿨어요. 내게 주어진 일이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무엇보다 현지 사람들과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가 몽골에서 한 일은 중앙연구실 소장으로서 대학원생을 지도하고 결핵·성명·브루셀라 등에 대한 WHO·UNFPN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분자생물학·임상미생물학·면역학·영어논문 쓰는 법 등에 대한 강의와 세미나를 진행한 것이다. 그의 강의는 제법 반응이 좋아서 몽골의대는 물론 외부 병원에서 온 의사들에게도 인기를 얻었다. 그뿐 아니라 대부분 의학교과서가 러시아어로 쓰여 있어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영어 교과서를 지원, 몽골어로 재편집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 개발 사업도 벌였다. 수술 및 강의 자료를 녹화해 시청각 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처음 중앙연구실을 둘러봤을 땐 막막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철수하면서 쓸만한 기구들은 모두 가져가버리고 전부 고장난 기계들만 가득 채워져 있더군요. 제가 가져간 실험 기구라고는 저울과 pH meter, spectrophometer 뿐이었고요. 마음을 굳게 먹고 청소부터 시작했습니다. 먼저 못쓰는 기구들을 버리고 방을 깨끗하게 수리하고 청소했습니다. 필요한 기구들을 서로 나눠 쓸 수 있도록 연구소 간 네트워크를 만들고 우수 인력을 키우기 위해 대학원생을 받아 교육한 결과, 나중에는 WHO 연구비를 따낼 정도로 성과를 냈죠."

영하 35도를 넘나드는 추운 날씨에 난방시설이 열악해 손을 호호 불어가며 공부해야 했던 연구실에서도 박진용 선생은 몽골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였다. 한 달 의사 월급이 70~80달러에 불과한 몽골에서 우수 인력을 키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연세의료원의 도움을 받아 매년 몽골의과대학 교수 4~5명을 한국에 연수보내고, 매년 1~2명의 대학원생을 선발해 지도한 끝에 2004년까지 5명의 석사를 배출시켰다. 어렵고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행복했노라고 말한다.

"언제나 힘이 되어 주는 가족과 저를 믿고 따라와준 학생과 교수 덕분에 힘든 줄 몰랐습니다. 2001년부터는 BASIC이란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고요. 한창 안정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몽골로 의료선교를 떠나겠다는 저를 믿어주고 도와준 가족에게 감사해요."

이런 걸 두고 천생연분이라고 하나. 의과대학 시절 본과 1학년과 예과 1학년생으로 만난 두 부부의 삶의 목표는 꼭 닮아 있다. 두 딸 마저 몽골로 떠나는 부모의 속을 썩이기는 커녕 흔쾌히 짐을 꾸려 몽골로 가선 홈스쿨 과정을 밟으며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다. 더구나 미국 코넬대학 의예과 과정에 있는 첫째 딸은 소아과 의사가 되어, 고등학교 1학년인 둘째 딸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부모의 뒤를 잇겠다니 가족 구성원의 동질성이 실로 놀랍다.

"다음주 금요일이면 다시 중국 심천으로 떠나요. 한 1년 정도 쉬었으니 다시 떠날 때가 됐어요. 그곳에 가면 탈북인들도 많을 거에요. 연세의료원이 뒷받침 해준 몽골 프로젝트와는 달리 이번 프로젝트는 개인적으로 떠나는 거라 부담이 되긴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처럼 주님이 잘 이끌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언제 다시 그를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이 내내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이번 중국 프로젝트로 그가 마지막 꿈의 목적지로 삼은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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