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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닥터의 좌충우돌 성공기

울트라 닥터의 좌충우돌 성공기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6.10.2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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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란 회원(경북대병원 임상시험센터 조교수)

<윤영란 회원>

이름

윤영란(39)

소속

경북대병원 임상시험센터 조교수

경력

1991

인제의대 졸업

 

1991~1998

서울대 의학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1995~2003

인제의대 약리학교실 전임강사, 조교수

 

2004~2005

미국 UCSF 교환교수

 

2005~

경북의대 분자의학교실 조교수

 

 

경북대병원 임상시험센터 조교수

 

“국내 임상약리학계의 차세대 리더”
이형기 회원(미 의약품개발과학센터 디렉터)
윤영란 교수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국내 임상약리학계의 차세대 리더 중 한 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윤 교수는 제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UCSF 의과대학의 닐 베노비츠 교수 밑에서 임상약리학을 하면서 왕래가 잦았는데, 1년전쯤 한국으로 돌아가 갈고 닦은 실력을 차근차근 실천해가고 있더군요.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부지런히 발빠르게 움직여 경북대병원이 보건복지부 지정 지역임상시험센터에 선정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그 이후로 대구 경북 지역에 임상시험과 연구의 새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 전에 서울에서 열린 세계제약의학회에서 윤 교수를 만날 수 있었는데, 역시 예상이 틀리지 않게 단기간 내 경북대병원의 임상시험센터와 임상약리팀을 국내 최고 수준을 성장시켰더군요. 지칠 줄 모르는 정열과 섬세함을 두루 갖춤으로써 강온을 겸비한 여의사로 활발히 활동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윤영란 회원을 만났습니다>

 인생 뭐, 그렇다. 막 세공을 끝낸 다이아마냥 휘황찬란하고 맨질맨질하면야 좋으련만, 오랫동안 주부의 손과 동고동락한 수세미마냥 거칠거칠하고 이물질도 더러 묻어있는, 그런게 인생이렷다. 중요한 건 얼마나 겉모습이 윤기가 흐르고 밝게 빛나는 지가 아니라, 얼마나 그 쓰임새를 잘 발휘해서 진가를 발휘하느냐이다.

굴곡없는 삶이 어디 있겠냐마는, 윤영란 교수는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유난히 힘들고 어려운 시절들을 견뎌냈다. 그래서인지 짧은 시간 안에 깜짝 놀랄만한 성과들을 거두며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윤 교수는 대구 경북지역에 임상시험센터가 전무하던 때 경북대병원에 부임, 단시간에 보건복지부 지정 지역임상시험센터에 선정될 수 있도록 이끈 실력파다. 게다가 지방 병원이란 단점을 극복하고 1년만에 연구간호사 6명·실험실 연구인력 6명 등 남부럽지 않은 전문인력들을 쑥쑥 키워내는가 하면, 센터 내 유일한 임상약리학 의사로서 여러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해내 임상약리학계의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알고보면 윤 교수의 8할은 시련과 위기가 키웠다. 그의 ‘성공기’는 의과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약리학 교실에서 학생 조교를 했던 일이 그가 임상약리학계에 발을 담그게 된 결정적 계기.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보통 1년 정도 학생조교를 하는데, 저는 무려 4년동안이나 조교 생활을 하면서 기초 교수가 되고 싶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졸업하고 약리학교실에 지원을 했는데, 교수님이 불러주시질 않는 겁니다. 결국 11월에나 돼서야 다 포기한 채 인턴시험을 보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제서야 절 불러주시더군요. 서울대에 가서 공부하고 오라고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는 곧바로 모교인 인제의대에서 약리학 조교수로 근무할 수 있었으니, 이젠 제법 순탄한 삶인가 보다 했다.

그러나 시련은 예고없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결혼 생활을 정리하면서 모교의 안정적인 교수직도, 동료 선후배 친구들도 뒤로 남긴 채 모든 것을 털고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더이상은 버릴 게 없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미련 없이 떠났습니다. 그 땐 아예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죠. 하지만 한국에 돌아갈 기회가 있더군요. 주위에서들 많은 격려를 보내주셨고, 또 잘 할 자신이 있었기에 귀국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니까 결심했던 이상 잘해야겠죠?”

임상시험센터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귀국한 그에게는 또다른 시련이 있었다. 의과대학 내 자리를 얻긴 했지만, 국립대병원이란 특성 상 병원 직위가 없어 여러 제약들이 뒤따랐던 것.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사립대병원과는 또다른 분위기였달까요. 하다못해 의사 처방지 한 장도 마음대로 가져다 쓰지 못하고 연구비에서 모두 충당해야 했거든요. 그래도 병원장님을 비롯 주위 많은 선생님들께서 도와주셔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불모지에서 시작한 센터가 1상 임상시험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인력과 실력을 갖췄지만, 윤 교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주위의 찬사와 칭찬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병원에 임상약리학과를 만들어 전공의를 훈련시키고 싶고, 외국처럼 임상약리학과 외래도 열고 싶다.

“‘이만하면 됐다’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들 하시지만, 저는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은 걸요? 저를 믿고 따르는 후배들과 직원들에게 그동안 제시했던 비전을 실현시켜주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해요. 최소한 거짓말쟁이는 되지 말아야죠. 덕분에 욕심이 많다는 말을 많이 듣긴 하지만요.”

밤 12시까지 쉴틈없이 연구에 매진하던 모교 교수 시절에서 도시락싸고 빨래하고 아이 뒷바라지하면서 바빴던 미국 교환 교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다시 학교로 병원으로 쫓아다니며 눈코뜰새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25만원짜리 월세에서 벗어나 큰 맘먹고 집도 구입했다기에 이제는 대구에 자리잡는가 보다 했더니, 아직 모르겠단다.

“몇 번 인생의 굴곡을 겪다보니 무언가를 정해놓고 사는 삶에 회의적이에요. 단지 마음을 비우되, 현재에 최선을 다할 뿐이죠. 그게 결국 저의 강점이에요.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매사에 열정적으로 하면서 내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것.”

“‘열정’이란 단어와 코드가 맞아서” 노래방만 가면 혜은이의 ‘열정’을 즐겨 부른다는 그녀. 63.3km의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는 것도, 뒷말 많은 한국에서 꿋꿋하게 싱글맘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도 그 열정 때문이 아닐까. 메신저 닉네임처럼, 그에겐 ‘울트라 닥터’란 말이 딱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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