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독립운동가 이태준을 아십니까
의사 독립운동가 이태준을 아십니까
  • 이현식 기자 hslee@kma.org
  • 승인 2006.08.24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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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 '한국의사 100년사로 본···' 심포지엄 개최
보훈처 확인 의사독립운동가 50명 일대기 소개
▲ 의사 독립운동가 이태준 선생을 비롯 50명의 일대기가 소개돼 큰 관심을 모은 의협 '한국의사 100년사...' 심포지엄.

이태준. 독립운동가. 1883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했다. 호는 대암(大岩).

의전 재학시절부터 일제의 침탈로 피폐해진 조국의 국권을 수복하기 위해 구국운동에 평생을 바친 대표적인 의사 독립운동가다.

대한의사협회와 의협창립100주년위원회는 19일 의협 동아홀에서 '광복61주년 기념 한국 의사 100년사로 본 의사 독립운동'을 주제로 첫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뜨거운 애국심과 동포애로 격랑의 시대를 온몸으로 헤쳐나간 의사(의대 재학생 포함) 독립운동가 가운데 이태준 선생을 비롯해 국가보훈처가 공적을 확인한 50명의 일대기가 소개돼 큰 관심을 모았다.

파리강화회의 참석하는 김규식에 여비 건네

이태준은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에서 이또오 히로부미를 함살한 안중근 의사의 일에 연루돼 옥고를 치룬 도산 안창호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그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가로서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남경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독립군을 도왔다.

그후 다시 몽골의 수도 고륜으로 넘어가 병원을 개업한 그는 몽골 국왕의 주치의로 명성을 날렸다. 몽골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을 정도로 유망한 의사였지만 한 순간도 빼앗긴 조국을 잊지 않았다. 1918년 9월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 참석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몽고로 오자 독립운동 자금 2000원을 제공해 활동을 지원했다.

이태준은 소련 정부가 임시정부에 지원하는 자금 운반 책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1920년 7월 그는 헝가리 출신 폭탄기술자를 항일 단체에 소개해주려고 동행하다가 몽골에서 일본군 장교와 손을 잡은 러시아 백위파부 대원에 의해 피살됐다. 당시 그의 나이 38세.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높이 평가해 1980년 대통령 표창을 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길여 100년위원장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안"

이날 심포지엄에서 장동익 대한의사협회장은 "이 땅에 현대의학이 뿌리내린 지 1세기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의사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게 되어 감개무량하다"고 밝혔다.

이길여 의협창립100주년위원장은 "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 유족 가운데 자녀들은 이미 작고하고 손자나 손녀는 독립운동 사실에 대해 잘 몰라 유품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사업임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이승호 연세의대 동창회장은 "세브란스병원도 지난 1985년 100주년을 맞아 의사 독립운동가를 찾다가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의대 교수들이 중심이 돼 자료를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내후년에 의협 100주년이 지나면 누가 여기에 관심을 갖겠냐"며 "지금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하권익 서울의대 동창회장은 "전에 서울보훈병원장으로 재임하던 중 보훈에 대해 비로소 공부하면서 모르는 게 많아 많이 부끄러웠다"며 "의사 한 명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촉매 작용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100주년위원회처럼 영구적인 재단을 설립해 서훈에서 빠진 의사들의 독립운동 자료를 발굴하고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의대 재학 중 일본 경찰에 쫓겨 중퇴해야만 했던 애국지사들에게 명예졸업장을 주자는 아이디어도 내놨다.

이날 심포지엄에선 박윤형 100주년위원회 집행위원장(순천향의대 교수)의 주제발표에 이어 김희곤 독립기념관 연구소장·김용달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연구관·이승호 연세의대 동창회장·하권익 서울의대 동창회장·홍예원 MBC 보도국 부장 등이 토론을 벌였다.

한편 이날 발표된 의사 독립운동가 중 몇명을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필순(1878~1919) =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만주와 몽고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08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다.

도산 안창호와 결의형제를 맺고 1907년 신민회 창립 멤버가 됐다. 1900년대 세브란스병원에 재직하면서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장소로 제공했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해 이동녕·전병현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힘썼다. 그후 내몽고 치치하얼에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의료업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중 일본인 조수가 주는 우유를 먹고 순국했다.

그의 집안은 가족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투신해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은 사람만 6명이다. 김규식과 서병호가 그의 매제이며, 여성독립운동가 김순애가 여동생이다.

 ◆주현칙(1882~1942) =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했다.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 평안북도 지회에서 활동했다. 일제가 신민회를 해체하기 위해 조작한 '데라우찌총독 암살음모사건'으로 1911년 체포돼 1심 재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2심재판에서 무죄로 석방됐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고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 평안북도 조사원에 임명되고,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로 활약했으며, 대한청년독립단과 상해거류민단에도 가입했다.

1922년 상해 국민대표회기성회에서 안창호·여운형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와 국민대표대회의 개최를 주장했다.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해 1926년까지 상해에서 활동했다.

그 후 귀국하여 국내의 흥사단 운동에 진력하다가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으로 일제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한금원(1904~1949) = 평북 의주 출신으로 1934년 동경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고향인 의주에서 개업하던 중 중국으로 망명한 친형 한 철과 국내에 파견되는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했다.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호남성에 정착해 형수인 김영란이 경영하던 박애병원에서 의료사업에 종사하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1938년 6월부터 1945년 8월까지 민족혁명당의 의무책임자로 활동했다. 특히 1938년 10월 창설된 조선의용대 의무조장을 맡았으며, 1942년 4월 1일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 후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1지대 의무주임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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