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5-28 06:00 (화)
"봉사는 '함께 산다'는 의미입니다"

"봉사는 '함께 산다'는 의미입니다"

  • 김혜은 기자 khe@kma.org
  • 승인 2005.12.01 16:33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aring Physicians'에 선정된 김동수 교수

그는 밤에 오는 환자도 모두 치료해줬다고 했다. 외지고 소외된 지역에서 근무시간과 여가 시간을 구분해서 생활한다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저절로 알아서였을까. 아니면 평생을 외지고 소외된 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위해 한번쯤은 자신의 '개인적인 시간'을 소외시켜도 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당시 군의관이었던 그는 군인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인근 마을에서 온 환자들까지도 모두 돌봤단다. 강원도 현리는 말 그대로 소외된 지역이었고 특히 의료부문은 더욱 취약해서 군의관인 그의 몸이 몇 개로 복제된대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러다 군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로 돌아오기 전 그는 병원장으로부터 표창장도 받고 '현리의 슈바이처'라는 칭호까지 얻게 됐다.

 

아이 환자들을 진료할 때마다 아이를 무릎에 앉혀서라도 '눈높이'를 맞춘다는  김동수 교수는 사랑의 수위 만큼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김동수 교수(연세의대 소아과)는 여기까지 말했을 때는 "슈바이처는 무슨 슈바이처였겠어요, 심심한데 뭘 해요, 그냥 한 거지"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서울로 짐 꾸려서 올라오던 날이었던 거다. 군인 가족들, 동네 주민들, 이웃 마을 주민들이 한 명씩 연달아 나타나며 떠나는 트럭을 붙잡았단다. 가진 것도 많지 않고 딱히 줄 것도 없고 해서 저마다 초코파이 한 상자씩 가슴에 안고 와 기어이 그에게 안겨주고서야 환송인사를 했다. 초코파이의 카피가 '정'이라고 했던가, 이런 정만큼 진한 정이 또 있을까.

마음이 약하고 정에 약하다는 그는 이 대목에서는 마냥 웃지만은 않았다. 아주, 약간 기자가 예리했기 때문에 포착했을 만큼 그는 조금은 감상적이 돼 아직도 그 때의 감동과 고마움을 그대로 느끼는 듯했다.

그를 만나고 오는 길에 전우익 씨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 제목이 떠올랐다. "혼자만 잘 살믄 별 재미 없니더. 뭐든 여럿이 노나 갖고, 모자란 곳을 두루 살피면서 채워 주는 것, 그게 재미난 삶 아니껴."라는 말이 김 교수의 봉사 인생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했다.

 

■ "봉사 왜 하냐구요? 마음이 약해서지"

진부한 방식이지만 김 교수의 봉사 역사를 한번 훑어 본다. 연세의대 시절 하계 및 동계 격오지 진료봉사, 베트남·몽골 봉사, 터키 지진지역 봉사, 우즈베키스탄 봉사, 아프가니스탄 전후지역 봉사, 인도 구자라트 지진지역 봉사, 이라크 전후지역 의료봉사,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지진해일지역 봉사, 파키스탄 지진지역 의료봉사….

굵직굵직한 봉사활동만 나열해봐도 그를 '의료봉사계의 대부'라고 칭할 만하다. 마음이 강해야 오지를 탐험하는 듯한 봉사활동에 적극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그는 스스로를 심약하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누구나 측은지심은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만 저는 유독 그런 심리가 발달해 있었습니다. 불쌍한 상황이나 사람들을 볼 때면 그게 못견디도록 마음이 아팠고, 그런 쓰라림은 어떤 형식으로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서 조금이나마 치유됐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종교에 몸담았었기 때문인지 그의 말투마다 종교적인 색채가 묻어났다. '심약하고 소심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도 강인하게 이타적인 삶을 살아온 그를 정신적으로 지탱해준 힘도 역시 종교였던 듯싶다.

"사실 중학교 시절에는 한동안 종교를 등지고 반항 아닌 반항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채플시간에 문득 성경 말씀이 가슴에 꽂히는 겁니다. 그제서야 철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마음은 약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살자고 다짐한 것도 종교적인 힘이 컸습니다."

 

■ "여보, 꼭 당신이 가야 해?"

의대 본과 1학년이던 1973년 여름, 그는 김제에 있는 나환자 정착촌을 찾았다. 여름방학을 맞은 봉사활동 차원이었다. 손과 발이 썩어서 문드러져 있고, 신경마비에 눈썹이 모조리 빠져 있는 환자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김 교수는 의료 서비스가 절실한 곳이 분명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의사라는 직업이 제게 있어 생계수단임은 분명했지만 제가 가진 기술을 통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어디든 나서자고 다짐했습니다. 제가 그들의 고통을 나눠 가질 수는 없지만 함께 고통을 느끼려 하고 덜어내고자 노력한다면 서로가 뿌듯한 일 아니겠습니까."

봉사생활에 몸 담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점은 자신의 '봉사활동'으로 인해 누군가의 '봉사'를 강요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의 봉사를 강요해야 한다. 일정부분 개인적인 시간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의 봉사도 강요해야 할 일이 생긴다. 가족과 함께 해야 할 시간들을 가족 외의 사람들을 위해 할애하기 때문이다.

"용천에 봉사활동을 갈 때였습니다. 늘 담담하던 아내가 그날 만큼은 유난히 말리더군요. 아내 입장에서는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저 역시 늘 담담했지만 그때 만큼은 '혹시 이게 가족을 보는 마지막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어서 코끝이 시큰하더라구요. 결국 북한에 들어가는 게 허용이 안 돼 못 갔지만 말입니다"

 

■ "아빠, 이번에도 또 갈거지?"

봉사활동을 위해 짐을 꾸리기도 전에 딸은 으레 당연하다는 듯이 "아빠, 이번에도 갈 거지?"라고 공연한 확인을 해온다고 한다. 어느새 그에게 '당연한' 일이 된 봉사활동이 가족에게도 '당연한' 일이 됐다.

아이 환자들을 진료할 때마다 아이를 무릎에 앉혀서라도 '눈높이'를 맞춘다는 그는 사랑의 수위 만큼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는 듯했다. 눈높이를 맞출 때 봉사활동도 더 이상 남을 돕는다는 의미가 아닌 함께 산다는 의미로 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러한 노력을 알아줘서였을까. 김 교수는 올해 '한미참의료인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세계의사회(WMA)가 세계 각국의 참된 의사 65명을 선정해 엮은 책 'Caring Physicians of the World'에 실렸다. "훌륭한 사람들도 많은데 부끄럽다"며 '소심하게' 웃는 그에게서 다시 한 번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란 말이 떠올랐다.

<이 지면에 사용된 Copyright은 Agence France Presse에 소유권이 있습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