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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퇴르의 자취를 찾아서 <下>

파스퇴르의 자취를 찾아서 <下>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5.04.23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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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퇴르연구소

파스퇴르 연구소에서는 이런저런 행사들이 많이 열린다. 국제학술대회를 많이 개최할 뿐만 아니라 연구소가 대학과 연계하여 학위과정을 운영하고 또 자체적으로 많은 연수·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강의·세미나·강연들이 끊임없이 열린다.

아마 필자가 기생충학을 계속 했더라면 그런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고 참석도 했겠지만 이제는 다른 길을 가고 있어 참석한 적은 없다.

다만 한달에 한번 꼴로 역사에 관한 강연이 열리는데 거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자크 모노와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프랑수아 자콥의 강연을 듣는 기회도 얻었다. 이러한 학술행사 외에 일년에 한번 연구소 후원행사가 열린다.

이것은 많은 화가들이 기증한 그림을 팔아 후원기금을 마련하는 행사이다. 후원행사에 나온 작품들이 대개는 유학생 신분으로 구입하기에는 부담스런 가격이었지만 십만원 대의 작은 그림들도 있었다. 살까말까 망설이다 결국은 사지 않았는데 기념 삼아 한점 살 걸 그랬다는 후회가 남는다.      

다른 분야도 비슷하지만 의학에서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교류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미국과 독일에는 일제시대에도 적지 않은 한국인이 의학을 공부하러 갔으나 필자가 아는 한 해방 이전에 프랑스에 유학을 한 한국인 의사는 없었다. 한국인으로서 프랑스에 유학한 최초의 의사는 서울의대 생화학 교수로 있던 이기녕 선생이다.

선생은 1952년 12월부터 1956년 5월까지 파스퇴르 연구소에 유학을 했고 파리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선생은 프랑스에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 의사이자 파스퇴르 연구소에 온 최초의 한국인이기도 한 셈이다. 이기녕 선생 다음으로는 1954년 당시 국립중앙방역연구원에서 근무하던 김현규 선생이 파스퇴르 연구소에 갔다.

선생은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개발한 BCG 생산방법을 배우기 위해 3개월 정도 파스퇴르 연구소에 머물렀는데 이는 유학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특정 기술의 습득을 목적으로 한 단기연수였다. 선생은 후에 덴마크와 미국에 거주하며 결핵균에 관련된 연구를 계속하였다.

한편 그 이후에는 이근배 선생(생화학)·이영택 선생(의사학) 등의 한국인 의사가 프랑스에 유학하기는 했으나 파스퇴르 연구소에 간 것은 아니었다. 이기녕 선생 다음으로 파스퇴르 연구소에 유학한 한국인 의사는 60년대 초에 프랑스에 간 윤정구 선생(종양면역학)이다. 프랑스에 20년 이상 체류하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하다 1984년에 귀국한 선생은 연세의대를 거쳐 아주의대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 했다.

1970년대와 80년대까지는 프랑스 정부의 지원 프로그램으로 적지 않은 한국인 의사들이 프랑스에 유학했는데 그 가운데 민득영 선생(기생충학)이 릴의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연구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생물학·생화학·분자생물학 전공자들이 파스퇴르 연구소에 유학을 오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현재 학계에서 활발히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가 프랑스에 있는 동안 파스퇴르 연구소에는 아내 이외에 박사과정에 있는 한국인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파스퇴르 연구소로 유학 오기 전 연세의대의 임상의학연구소에서 조교로 일한 경력이 있어 필자와는 더욱 쉽게 친해졌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의 NIH로 박사학위취득 후의 연구원(Post Doc.)으로 떠났다.

프랑스의 대학은 영미의 대학과는 달리 동문회라는 것이 없다(프랑스의 엘리트들이 가는 그랑 제콜은 예외이다). 프랑스의 대학은 모두 국립이라 학교 사이의 구별이 큰 의미가 없고, 특히 파리에서는 자신이 등록한 대학만이 아니라 다른 대학에 가서 강의를 듣거나 세미나에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또 관심 영역이나 필요성에 따라 두세 군데 대학에 동시에 등록해 다니는 경우도 적지 않아 이 학교가 모교라거나 내 학교라는 의식이 아주 희박하다.

필자의 경우도 첫 해에만 필자가 등록한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고 나머지는 관심에 따라 다른 학교나 이런저런 연구기관을 돌아다니며 강의나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래서 파리에서는 등록을 어느 학교에 하든 파리 시내 전체가 캠퍼스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래서인지 영미의 대학에서 유학한 사람들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학교별 동문회를 만들어 열심히 모이는 반면 프랑스 유학생들이 그렇게 대학별로 동문회를 만들어 모이는 것은 아직 보지 못했다.

이런 현상은 앞서 말한 프랑스 대학 제도의 특성 이외에 프랑스 특유의 개인주의적 분위기의 세례를 받은 탓도 있을 것이다(흔히 서양인들은 개인주의적이라고 하는데 서양에서도 프랑스 인들은 특히 개인주의적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파스퇴르 연구소는 대학도 아닌데 프랑스 사회에서는 드물게 동문회와 같은 졸업생(?) 조직을 갖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일하거나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을 모두 '파스토리앙(Pastoriens)'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파스퇴르인'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조직은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동문회보 같은 성격의 잡지도 발간한다.

귀국하기 얼마 전 아내에게 소식지라도 받아보게 동문회(?) 본부에 주소라도 알려주라고 했지만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는 아내는 내 요청을 묵살했다(참고로 말하면 아내는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2년 동안 일하면서도 연구소 구내에 있는 파스퇴르 박물관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

필자가 파스퇴르 연구소와 인연 아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곳에서 일한 아내 때문이었다. 만약 아내가 그곳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파스퇴르 박물관을 한두 번 방문하는 것으로 나와 파스퇴르 연구소와의 인연은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의 처음에 밝힌 것처럼 필자는 아내를 매개로 그다지 순수하지 않은 동기에서 파스퇴르 연구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전공과 관련하여 파스퇴르라는 이름이 의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파스퇴르 연구소를 더욱 깊이 알고 싶은 욕심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파스퇴르나 파스퇴르 연구소가 필자의 연구주제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파스퇴르 연구소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흔히 먹은 밥그릇 수로 어떤 분야나 직종의 숙련도나 친숙도를 가늠하는데, 모르긴 해도 파스퇴르의 정식 연구원이나 직원이 아니면서 나만큼 파스퇴르 연구소의 밥을 많이 먹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도 나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지만 나는 스스로를 '명예 파스토리앙'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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