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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펠리에 의과대학

몽펠리에 의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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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24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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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노스트라다무스는 의사?

떼제베를 타고 남불로 향했다. 파리에서 겨울을 지내 본 사람은 파리가 얼마나 우울한 도시인지를 안다. 그리고 보들레르가 쓴 산문집의 제목이 왜 '파리의 우울'인지도. 서유럽 사람들은 햇빛에 굶주린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남쪽 나라 이탈리아를 동경하고 지중해를 동경했을지도 모른다.

남불로 들어서면 풍경이 달라진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온화한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몽펠리에는 지중해의 밝음을 간직한 도시이다. 누군가 프랑스의 도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지체 없이 몽펠리에라고 대답할 것이다. 역구내를 빠져나와 구시가지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본다.

시내 중심부에는 아주 넓은 광장이 있다. 그 광장 한쪽에서는 회전목마가 돌아가고 여기저기에 자리잡은 노천카페에는 한가로운 여행객들이 담소를 나누며 잔을 기울이고 있다. 광장의 한쪽 모퉁이를 거쳐가는 전차에서 내는 종소리가 정겹다.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광장을 가로질러간다. 조금 경사진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 보면 물을 뿜어내는 작은 분수가 나타나고 그 주위에는 장이 서있다. 중세 어느 도시의 한모퉁이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드는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돌로 된 육중한 건물이 눈앞에 들어온다. 몽펠리에 의과대학이다.

의과대학으로 들어가는 문 오른쪽 벽에는 해시계가 붙어있는데 거기에는 "의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잠언 첫 구절이 희랍어로 새겨져 있다. 시간을 알려주는 해시계 위에 인생의 유한함과 의술의 장구함을 말해주는 구절을 새겨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듯했다. 몽펠리에 의과대학은 현존하는 유럽 최고(最古)의 의과대학이다. '현존하는'이란 단서를 붙인 이유는 살레르노의 양생훈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살레르노 의학교가 그보다 앞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때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전성기를 구가했던 살레르노 의학교는 일찍이 학교가 폐쇄되어 지금은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상태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의학사가였던 샤를 다랑베르는 살레르노를 방문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849년 나는 두 차례에 걸쳐 살레르노를 방문했다. 과거 한때 모든 과학과 의학적 활동으로 활기가 넘쳤던 거리를 나는 슬픈 심정으로 헤매고 다녔다. 나는 거기서 유명한 대가들의 흔적이나 기억을 찾아보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전통의 어떤 흔적도 옛날 건물의 돌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 도서관에서도 살레르노 양생훈의 필사본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살레르노 의학교에 비하면 몽펠리에 의과대학은 훨씬 행복하다. 몽펠리에 의과대학은 지금도 건재할 뿐 아니라 그네들의 역사에 관한 자료들도 풍부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몽펠리에 의과대학의 기원은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대학이 초창기에 배출한 유명한 인물들로는 먼저 중세 말기에 활약했던 유명한 외과의사 기 드 쇼약(Guy de Chauliac 1300~1360년), 의사보다 점성가로 더 알려진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Michel de Nostre Dame 1503~1566년), 그리고 역시 의사보다 문학가로 더 유명한 프랑스와 라블레(Fransois Rabelais 1494~1553년) 등이 있다.

이들을 비롯하여 몽펠리에 의과대학 출신의 유명한 의사들의 이름은 의과대학 홀의 벽면에 영화에서 본 모세의 십계처럼 생긴 두 쪽의 돌판에 새겨져 있다. 마침 방문한 날이 휴일이라 유명한 해부학 박물관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의과대학으로 들어가는 문의 오른쪽에는 몽펠리에 생기론의 대표자 바르테즈(Paul Joseph Barthez 1734~1806년)의 동상이 서있다. 생기론은 데카르트와 뉴튼의 기계적 세계관을 의학에 받아들여 인간을 기계로 보고 접근하는 방식에 반발하여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에는 생명의 원리가 있어 그것이 생명체와 생명이 없는 다른 존재를 구별 짓는다는 입장이다.

물론 기계론에 반대하는 입장은 몽펠리에 학파만의 특징은 아니고 슈탈(Georg Ernst Stahl 1660~1734년)이나 반 헬몬트(Jean Baptiste van Helmont 1577~1644년)와 같은 의학자들도 주장했던 바이다. 그러나 특히 슈탈과 같은 독일어권의 학자들의 이론은 전통적인 독일 낭만주의와 자연철학(Natur Philosophie)의 영향으로 사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측면이 두드러져 생기론(vitalism)이 아니라 물활론(animism)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무튼 18세기 후반부터 생기론은 몽펠리에 학파의 공식적인 학설로 자리잡았는데 이런 영향은 어떤 의미에서는 20세기 전반까지도 지속되었다. 혹자는 생기론의 사변적인 측면으로 인해 몽펠리에 학파는 19세기 이후부터 그들과 경쟁관계에 있던 파리의과대학에 뒤졌다고 보기도 한다. 의과대학 건물은 생 브느와 수도원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은 중세기 의학과 종교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실제로 이 수도원에서는 몽펠리에 의대에 공부하러 온 새로운 학생들을 맞아 안내해주고 숙소를 구해주는 일과 때로는 재정적인 지원을 하기도 했다. 수도원 건물을 돌아가면 좁은 골목이 나오는데 여느 대학가와 마찬가지로 복사집이며 문구점, 샌드위치 가게 등이 골목 양편으로 자리잡고 있다. 점심때가 가까워 어디로 갈까 두리번거리다 케밥 집으로 들어갔다.

학교 앞이라 그런지 가격도 싸고 양도 푸짐해 혼자는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양이 많다. 점심을 먹고 학교 옆길 건너편에 있는 식물원에 갔다.

그 식물원은 의과대학에 딸린 식물원으로 16세기에 세워진 것이다. 의과대학에 무슨 식물원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약용식물 재배를 위해 식물원은 필수적이었으며 의과대학의 교과과정 중에 식물학이 들어있었다.

식물분류학자로 유명한 린네가 의사라는 사실과 지금도 한의학에서 본초학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본다면 식물학과 의학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식물원을 끝으로 몽펠리에 의과대학 방문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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