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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19 17:45 (금)
"봉사할 수 있는 기회 많은것도 복이죠"

"봉사할 수 있는 기회 많은것도 복이죠"

  • 김은아 기자 eak@kma.org
  • 승인 2005.03.24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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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진료봉사 12년째 김의동 원장

  스리랑카·인도·말레이시아·방글라데시·필리핀·르완다·보르네오·아프리카.
  김의동 원장(56·진해복음외과의원)이 지난 93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료봉사를 한 곳이다.
  소록도·대구·부산·인천·부평·전주·익산.
  그가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6년동안 옮겨다니며 살았던 곳들이다. 그는 거의 매 학년마다 전학을 해야 했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여러 지역을 떠돌아온 경험들은 그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 진해는 제 2의 고향

어린시절 팔도를 휘젓고 다니던 꼬마가 어느새 쉰이 훌쩍 넘어 진해에 정착한지 20년이 되어 간다. 진해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지만 이제는 토박이가 다 됐다.

"진해에서 군의관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때 조용하고 아름다운 진해의 풍경이 마음에 꼭 들었죠. 졸업한 다음 서울에서 살만한 형편도 안됐구요."

자신의 병원을 갖고 싶다는 꿈을 안고 진해에 내려와 시내 근처에 있는 작은 여관을 싼 값에 인수해서 복음외과로 출발했다. 손수 여관방을 병실로 만들고, 환자와 구급차가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담을 헐면서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기를 기도했다. 당시 진해에 외과 병원이 턱없이 부족했던 터라, 제법 많은 환자가 몰려들었고 2년 4개월만에 지금의 병원 자리로 이사를 했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 이쯤이면 병원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겠다 싶을 때 마침 의료봉사에 나설 기회가 찾아왔다.

■ 'Asthma'가 천식이라구요?

김 원장이 처음 의료봉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 93년. 평소 알고 지내던 목사님이 함께 의료봉사를 떠날 의사를 찾는다기에 선뜻 따라나서 1주일간 방글라데시에서 의료봉사를 하게 된 것이 인연이 돼 올해까지 무려 10회가 넘게 해외 의료봉사를 다녀왔단다.

"병원을 하루만 비우려해도 손이 여간 많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입원 환자를 퇴원시키거나 전원시켜야 하고, 예약된 환자들에게 양해를 구해 미뤄야 하고, 찾아 온 환자들을 돌려보내야 하고요. 할 일은 많고 그만큼 피해는 크죠. 그러다보니 개원하고 있는 의사는 일주일일 망정 자리를 비우는 게 쉽지가 않아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는 해마다 적어도 한 번은 의료 봉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의료봉사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워온다고 한다.

"인도에 갔을 때 제법 높은 계층의 노인이 진료소에 찾아왔어요. 오십견으로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며 현지 병원에 오랫동안 다녔던 모양인데 잘 낫질 않으니까 저를 찾아왔습니다. 며칠 진료한다고 쉽게 낫는 병이 아니어서 약만 처방해서 보냈는데, 다음날 노인이 손을 번쩍 들면서 뛰어오지 않겠습니까? 저는 단지 진통제와 소화제만을 처방했을 뿐인데요."

이런 경험을 통해 김 원장은 자신이 그곳에서 단지 육체적으로 그들을 치료해 주는 것 뿐 아니라 믿음과 희망이라는 다른 무언가를 더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런 깨달음이 지금까지 의료 봉사를 계속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고 한다.

"스리랑카 피해 지역에 천식이 유행한다기에 천식 약을 잔뜩 챙겨갔어요. 그런데 'Asthma'가 천식이 아니더군요. 뜻밖에 낭패를 봐 당황스러웠죠."

기자는 의사로부터 'Asthma'가 천식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서 적잖게 놀랐다.

"보통 현지에서 진료할 때는 현지 통역인과 같이 하게 마련입니다. 환자가 증상을 말하면 통역인이 영어로 말해주는데, 통역인이 'Asthma'라고 번역하면 그 환자는 그때부터 천식 환자가 되거든요. 그런데 환자들을 아무리 진찰하고 청진해봐도 천식 환자 증상이 아니었습니다. 알고보니 현지에서는 숨쉬기가 조금 힘들거나, 숨이 차면 'Asthma'라고 부르더군요. 해외에서 진료할 때는 의료진이 환자의 증상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주의깊게 진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현지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프차로 또는 걸어서 구석구석 의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역을 찾아다니지만 힘든 줄을 몰랐다. 때로는 위험천만한 지역에서 목숨을 내놓고 진료활동을 하기도 하고, 현지에서 강도를 만나 갖고 있는 짐을 모두 털려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그는 매년 왕진 가방을 꾸려 기꺼이 길을 떠난다.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남에게는 자주 찾아오지 않는 기회가 자꾸 찾아오거든요. 또 저와 함께 얼마든지 봉사활동을 떠날 준비가 돼 있는 아내와 간호사들, 이런 부모를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는 아이들이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남들은 평생에 한 번도 하기 힘든 해외 의료봉사 활동을 몇 년간 계속 해오고 있는 김 원장이지만 한창 젊은 시절엔 '돈 벌기 전에는 의료 봉사를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었단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데는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훌륭한 의사였던 부친은 평생을 나환자의 재활과 치료를 위해 헌신하셨다. 당시만 해도 의사가 되면 보장된 지위와 수입을 얻을 수 있었지만, 부친은 탄탄대로 인생을 포기하고 나환자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곤 했다. 그 때문에 김 원장의 가족들은 늘 배고프고 힘겨운 생활을 면하지 못했다. 어린시절 거의 매학년마다 전학을 다녔으니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었고, 학교생활에 적응하기도 버거웠던 김 원장은 의료봉사에 대해 좋게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그도 아버지처럼 의사가 됐고, 결국 지금은 아버지 못지 않게 열심히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그의 막내 동생도 연세의대 소아정신과 교수이고, 그의 큰 아들 역시 의학도이다. 큰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를 따라 해외 봉사활동을 다녔고, 현지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가며 물심양면으로 부모를 도와왔다.

"아들이 저보다 낫습니다. 전 젊은 나이에 봉사하기는 커녕 봉사 안하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저의 큰 아들은 벌써 해외 봉사활동도 여러번 다녀왔고, 저보다 그릇이 큰 녀석입니다."

'피는 못 속인다'라는 말처럼 아들이 아버지를 꼭 빼닮는 것은 당연하지만, 남을 돕는 일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아름다운 마음씨마저 대물림이 된 듯했다. 머지않아 그의 아들을 인터뷰할 날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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