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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다원화된 사회 이익단체 정치참여 당연
시론 다원화된 사회 이익단체 정치참여 당연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5.03.20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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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율(명지대 정치외교학 교수)
요사이 대한민국을 보면 절대 선과 절대 악 만이 존재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통과된 이후에는 이런 이분법적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한 사회내에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그 사회에서는 이분법적 투쟁, 즉 '전부 아니면 전무'의 전투밖에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와 같이 '쿠테타'와 '민주주의 승리'라는 극한 단어가 난무한 상태에서 다원주의하에서의 정치라는 문제를 논한다는 것은 너무나 '한가한' 생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 상태에서 학자들 마저 극단적인 논지를 편다면 이는 바람직한 학자적 자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서는 원론적인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느 상황에서건 '원칙'이 바로서야 혼란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칙과 제도라는 것, 이것들은 미래에 대한 예측성을 확보하는 데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정치라는 것은 갈등의 조정기능이다. 모든 사회에서, 특히 다원화된 사회에서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다원주의 사회라는 것은 절대적인 가치, 예를 들어 절대 선과 절대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보다는 차선과 차악 혹은 선인지 악인지 구분하기 힘든 모호성이 혼재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즉, 절대적 가치가 아닌 상대적 가치가 주류를 이루는 사회라는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도 주관적이라는 것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각자의 이익갈등을 당연한 현상으로 여긴다. 즉, 내가 내 이익을 중시하듯 다른 집단 혹은 다른 개인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이런 상대성 속에서 갈등의 조정과정을 거쳐 합의 혹은 타협을 도출하는 것이 바로 다원주의 사회의 정치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이익집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 그런데 절대 선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회에서는 '이익추구'라는 단어에 웬지 모를 거부감이 보여지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절대 선의 추구를 위해서는 모든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보다는 공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는 절대 선과 절대 악만을 구분하는 사회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원주의에서는 당연한 사고라고 할 수 없다. 다원주의라 사회에서의 공익이라는 것은 각종 집단, 혹은 개인의 이익의 절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역시 다원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한 의미에서의 다원주의 사회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집단주의적 의식이 상당 부분 잔재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영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아무리 잘 만들어진 영화라 하더라도 인구 1000만명이상, 다시 말해서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다는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TV드라마도 마찬가지이다.


인기 드라마 '대장금'도 시청율 50%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내세우며 계속 방영되고 있다. 외국의 경우 시청율 20%만 넘으면 상당히 인기 몰이를 한 것으로 생각한다. 시청율 50%, 관객 1,000만명 돌파 등의 현상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우리사회가 이렇듯 아직 다원주의 사회로 완전히 진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원주의라는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중요한 지향점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회구조가 복잡해 질수록, 이들 사이에서의 상대성을 인정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원주의 하에서 국회는 실제 사회적 제반 이익이 부딪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러한 국회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즉, 국회는 국민을 위해 있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공익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당의 기원을 보면 노조와 같은 이익집단이라는 사실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1800년대에 노조가 정당으로 바뀐 경우이다. 다시 말하면 정당이란 그 존재 목적이 자본과 노동이 갈등하는 사회에서 집단적 이익을 제도권 내에서 대표하기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국회에서 논의하는 정책 혹은 제도가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 집단의 이익과 배치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외국의 경우 많은 이익집단이 국회를 상대로 합법적인 로비를 하거나 혹은 구성원을 의회 의원으로 당선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물론 전제되어야 할 부분은 합법이라는 게임의 룰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다원주의의 순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단체의 정치참여도 이러한 차원에서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의사단체도 분명 직업적 이익을 위해 모인 이익집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단체는 다른 이익집단과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의사집단은 다른 이익집단과는 달리 국민들의 의료와 건강을 책임지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집단는 맹목적 이익추구를 해서는 안된다.


만일 혹자가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걱정한다면 이는 기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의사집단이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정치 참여를 추구한다면 선거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정치참여가 가능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다원주의하에서는 시스템의 완비와 이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면, 의사단체들 혹은 다른 단체들의 정치참여를 사시섞인 시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가 다원주의 추구한다면 보다 많은 이익집단의 정치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불법적 차원의 로비와 뇌물이 어느 정도 사라질 수 있을 것이고, 건전한 의미, 공개적 의미의 다원주의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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