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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보호자'... 인술 고집하며 살아온 67년
'서민의 보호자'... 인술 고집하며 살아온 67년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5.03.1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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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김순희 원장

· 1927년 함남 함흥 출생
· 1950년 함흥의전 졸업

  서민들의 보호자로 인술 고집하며 살아온 67년. 한때 ‘서민의원에 간다’고 하면 버스요금조차 받지 않았을 만큼 퇴계원에서 김순희 원장은 명망이 높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을 위해 고스란히 받쳐 온 인술 고집 67년.
  그녀는 영세민, 불우청소년, 갱생보호자, 윤락여성 등 낮은 곳에서 외롭게 사는 이들의 보호자가 되기를 자처해왔다.
 지금도 변함없이 12시간 진료를 펼치고 있는 서민의원 김 원장. 그의 넉넉한 오후 진료실을 찾았다.

  ■ 경기도 퇴계원 서민의원 김순희 원장

  어릴 적 배가 아파 밤늦도록 뒤척이던 때를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고통과 잠 사이를 더듬거리며 오갈 때 쯤 서늘한 손길 하나가 찾아와 아픈 배를 쓸어 내린다. 가끔씩 이마를 짚어 열이 있는가를 살펴본 후 다시 배로 향한 손위로 ‘할머니 손은 약손…’하는, 마술같기도 하고 혹은 주문같기도 한 작은 읊조림이 차곡차곡 쌓인다.

  어느 사이엔가 스르륵 잠이 들어 다시 아침을 맞았을 때 놀랄 만큼 가뿐하던 몸. 정성과 사랑이 담긴 손길엔 그렇듯 기적같은 효력이 있는 걸까.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 서민의원에 이 지역 명의로 손꼽히는 김순희 원장(67)이 있다. 서민의원에 들어서는 순간 빈부나 명예나 권력이 모두 그 허울 좋은 껍데기를 벗는다. 깊은 연륜과 경험의 할머니 의사 앞에 그저 철도 없고 말썽도 많은 자녀, 혹은 손자 손녀로 앉아 있게 될 뿐이다.

  김순희 원장은 지역 주민의 이웃이자 친구로, 다시없는 은인으로 각인되어 있다. 아무런 욕심없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편에서 60평생 봉사에만 전념해 왔기에 이젠 그가 없는 퇴계원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한다. 한 때 ‘서민의원에 간다’하면 버스요금조차 받지 않았다는 얘기가 이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김 원장은 1928년 8월 함남지방에서 1남 3녀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유교사상이 지배적이던 그때 셋째 딸은 어떤 면으로든 귀함받지 못하는 위치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래위 형제에게 제 몫의 귀여움은 빼앗겼다해도 공부를 하고 싶다는 간절한 의지 만큼은 양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1945년 10월 함흥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당시로서는 의사가 되겠노라는 신념보다 공부에의 의욕만이 앞섰고, 그 지역에 대학이라고는 함흥의전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진학의 유일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의학은 김 원장에게 신비한 의욕을 심어 주었다. 배울수록 궁금하고, 신비하고, 위대한 학문, 그래서 차츰 ‘이것이 나의 천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그 ‘천직’을 확인하고 수행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6.25사변이 터졌어요. 결국 1.4후퇴 때 고향과 부모님을 뒤로한 채 월남하게 되었죠. 새로운 환경에서 활동하기 위해 새로 의사 국가고시를 치러야 했는데, 그 시절이 제겐 가장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김 원장은 월남한지 5년만에 간암으로 남편을 잃었다. 어린 자녀 셋을 혼자 돌보며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 낮에는 병원에 나가 임상을 보았고 아이들을 재우고 난 늦은 저녁부터는 정신없이 공부에 매달려야 했다. 빠듯한 월급과 힘에 겨운 살림. 그러나 이를 악물고 전념해 68년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하는 쾌거를 얻었다.

  “동두천에 ‘김의원’을 개원해 첫 진료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취학했기 때문에 그때부턴 조금 부담을 덜 수 있었지요 당시는 동두천에 어려운 이웃이 너무 많았어요. 보릿고개라도 겹치면 입에 풀칠하기조차 버겁도록 구차한 살림 투성이었죠. 그들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우선 무료진료였습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해야 살 힘을 얻는 것 아니겠어요?”

  김 원장의 도움은 무료진료에서 그치지 않았다. 배곯는 이를 위해 라면을 사다 주는가 하면 배우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장학사업도 펼치기 시작했다. 김 원장 자신의 세 자녀를 키우는 일만으로도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것, 우리것만 끌어안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은 그래도 지역에서 인정받는 의사였고 남들처럼 하루살이가 버거울 만큼 어려운 여건은 아니었으므로.

  “힘들고 빠듯한 가운데서 정을 나누는 것이 더욱 보람있었죠. 재미있고 신이 났어요. 제겐 작은 도움 하나이지만 그들에겐 삶의 희망이 되기도 하거든요. 그때 ‘아, 이것이 내가 일생을 걸 일이구나’라는 걸 깨달았지요.”

  72년. 김순희 원장은 경기도 남양주시에 현재의 서민의원을 개원했다. 불우한 이웃을 위한 의료터전이라는 의미로 이름도 서민(瑞民)이라 지었다.

  전기라든가 교통사정 등이 영 불편하기만 했던 곳 남양주시 퇴계원. 국가 정책에 따라 새마을 사업이 추진중이었지만 마을에 활력이 붙기에는 아직 난점이 많았다. 지역유일의 병원으로써 의료소임을 다하고 있던 서민의원 김순희 원장은 퇴계원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주역이 되기 시작했다.

  72년 치료비가 없어 대퇴골 수술을 못받는 다섯살 난 영세민 자녀 무료 수술을 시작으로 숱한 영세민과 극빈자들의 보호자가 되기를 자처하고 나섰다. 영세민 자녀인 미경이, 영민이 등에게 김 원장은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학비 전액을 지원했다. 이러한 봉사는 고아원, 갱생보호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가정의 빈곤으로 인해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이씨(당시 38세)에게 김원장은 따스한 정을 베풀었다. 서민의원에 입원시켜 오랜동안 정성들여 치료한 결과 그는 결국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한다. 한편 갱생보호자 8명에게는 화훼농지 300평을 지원,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으며 무료진료 및 생활비 지원도 아끼지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일이 뜻대로만 되는 일은 아니었다. 김 원장의 도움을 받는 것을 마치 당연한 일인양 ‘돈 내놓으라’며 협박하는 사람도 있었고 잦은 말썽으로 속을 썩이는 일 또한 많았다. 그러나 김 원장은 굽히지 않는 의지와 신조로 꿋꿋이 맞섰다. 오직 한사람을 선도할 수 있다면 그것을 최대의 보람으로 알았다.

  이밖에도 소망원, 나눔의 집, 신애재활원 등 퇴계원 내에 그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만큼 바쁜 봉사의 나날이 이어졌다.

  “‘무궁화 친목회’라는 부인회를 만들어 지역봉사 활동을 벌이던 기억이 새롭군요. 빈병과 폐품을 주우려고 손수레를 끈 채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어요. 그 수익금으로 뭘 했는지 아세요? 노인회관 건립 대지를 마련하는 데에 썼답니다. 정말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노인회관을 세우겠노라는 의지로 매일 오전은 휴진, 폐품을 수집하러 나섰다. 그때 돈으로 하루 5, 6만원 상당을 거둬들였다고 하니 그 정성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결국 80년 노인회관 부지 50여평을 마련케 되었는데 이후에도 월 2회씩 10년 동안 이 일을 계속진행했다고 한다.

  김 원장이 노인 복지를 위해 쏟은 열정은 대단하다. 84년 지역내 17개 노인정에 TV와 오락시설, 연탄, 쌀 등을 고루 갖춰 놓았고 매년 겨울이면 월동 준비에도 만전을 기했다. 또한 낙후된 노인정을 보수 수리해 쾌적한 환경속에 생활할 수 있도록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지금도 응급 노인환자가 발생하면 손수 왕진가방을 챙겨 달려간다는 김 원장. 67세의 노력(老力)이 무색지 않을 만큼 열정적인 눈빛과 의지를 간직하고 있다.

  “젊은 날에는 열심히 벌어서 열심히 뛰어다니며 봉사하는 낙으로 힘있게 살았는데 이젠 여력이 별로 없어요. 그게 아쉬울 뿐이죠.”

  힘이 없고 약하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지금도 오전 9시 30분에 병원 문을 열고 저녁9시가 되도록 진료에 몰두하고 있다. 간호사를 찾는 목소리에도 왕성한 힘이 넘치는 것을 보면 해를 넘겨 늘어가는 나이만 섭섭할 따름이다.

  김 원장의 소박한 삶을 보여주듯 여덟평 남짓한 진료실은 꾸밈도 없이 오래된 책상과 소파, 책장, 진열장 몇 개만 놓여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진열장과 벽면 가득히 채워진 훈장, 표창장, 감사패. 94년 대한민국 헌법에 의거해 받은 최고의 영예 국가 훈장과 법무부장관 표창장이 자랑스레 걸려 있고 시, 도 등에서 수여한 감사장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다며 설명을 피하지만 그가 얼마만큼 왕성한 봉사를 펼쳐왔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바쁜 나날 덕분에 세 아이들에게 마음만한 정성을 더해주지 못했지만 늘 강조하고 또 강조하던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항상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살라는 것이죠. 바보같이 사는 것이 편안한 삶의 지름길 아니겠어요?”

  이 말은 김 원장 자신의 굳은 신조이기도 하다.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왔으므로 어려움 또한 모르고 살았노라 한다. 선한 일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고난이란 반드시 해결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진료 사이사이 대기중인 환자들에게 다가가 안부를 묻고,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을 살피며 내 자녀인양 걱정해 주는 할머니 의사, 열 세명 병원 식구의 어머니로, 서민들의 든든한 식구의 보호자로,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김순희 원장의 소망이 싸늘한 겨울의 석양을 따스하게 물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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