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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이 사회에 감동주는 '노을을 닮은 사람'
메마른 이 사회에 감동주는 '노을을 닮은 사람'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5.03.10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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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이종욱 원장

· 1938년 중국 출생
· 1972년 고려의대 졸업
· 신경정신과 전문의

  그가 의사가 되고, 정신과 전문의의 길을 택하게 된 데에는 남다른 사연이 깊다. 길고 암울했던 방황을 접은 후 바로 그런 혼돈과 극복에의 시간들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기에 타인의 정신적 방황에도 용감히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젊은날을 시름앓이 하고 있는 청소년들, 어두운 유혹에서 미처 헤어 나오지 못하는 마약 환자들, 그리고 자신이 쌓은 정신적 테두리 안에서만 칩거하려는 사람들에게 의학과 음악을 통한 인술을 이 원장은 잔잔히 펼쳐 나가고 있다.

  ■ 경남 마산 이종욱신경정신과의원 이종욱 원장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가슴으로부터 감동해내지 못하는 메마른 사람들. 어느새 머리로 사는 것이 가슴으로 느끼며 사는 것보다 현명한 방법으로 인식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물질적·기계적으로는 고도화된 사회라 할지라도 그럴수록 더욱 인간에게 절실해지는 것 또한 ‘가슴으로부터의 감동’이 아닐까.

  마산시 회원구 합성동 ‘이종욱신경정신과의원’ 이종욱 원장(58)은 이러한 ‘불감증의 시대’속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을 찾아내 ‘감동’으로 한발짝 다가서게 하는 매개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이 현대사회에 찌든 정신을 맑게 치유하는 근본된 해결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치료라는 것은 좋지 않은 상태를 좀더 나은 상태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말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신뢰로 이루어진 가정에서조차 분쟁이, 살인이 일어나는 이 각박한 세상에 훈훈한 정서를 되돌려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희 정신과 의사가 짊어진 가장 큰 숙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의사가 되고, 정신과 전문의의 길을 택하게 된 데에는 남다른 사연이 깊다. 길고 암울했던 방황을 접은 후 바로 그런 혼돈과 극복에의 시간들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기에 타인의 정신적 방황에도 용감히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젊은날을 시름앓이 하고 있는 청소년들, 어두운 유혹에서 미처 헤어 나오지 못하는 마약 환자들, 그리고 자신이 쌓은 정신적 테두리 안에서만 칩거하려는 사람들에게 의학과 음악을 통한 인술을 잔잔히 펼치고 있는 이종욱 원장. 그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1938년 만주.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시던 할아버지 덕분에 이종욱 원장은 북풍이 매서운 1월 타국 중국땅에서 태어났다. 해방되던 해 평북 선천으로, 48년 인천으로 다시 내려왔지만 1·4후퇴 때 또한번 남쪽으로 이주, 따스한 바다 바람과 더불어 부산에서도 몇 년간 살게 된다.

  안팎으로 안정되지 않은 세파가 높이 일렁거렸지만 젊은날 이종욱 원장은 남몰래 음악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음악을 고작 ‘잡기’로 밖에 여기지 않던 50년대가 아닌가. 결국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 부딪쳐 가슴에 가득 음율을 품은 채 또다른 이상을 찾아야 했다. 고심 끝에 그가 찾아낸 것이 바로 의사가 되는 길이었다.

  현 가톨릭 의대의 전신인 성신대학 의학부에 지원, 입학한 그는 학업에 전념하는 한편 ‘대한합창단’단원으로서 박인수 등의 동기와 함께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대학 2년때 뜻하지 않은 커다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어지러운 정세의 여파로 학생 모두가 시험을 거부, 백지동맹에 동참케 되었는데 이로 인해 뜻하지 않은 제적 처분이 내려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집안까지 몰락하는 불운을 얻어 이종욱 원장은 깊은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태어난 후 처음 겪는, 깊고도 긴 암울의 나날이 시작된 것이다.

  “조그만 방 한칸을 빌어 일곱 식구가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데다 큰 아들이 무위도식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견딜 수 없는 마음에 결국 집을 나왔습니다. 그리고나서 8년여를 방황했지요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정말 안해본 일 없이 다하며 살았습니다.”

  잡지사 기자로부터 연탄장사까지. 젊은 몸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조건없이 부대끼며 치러내던 시절. 그래도 대한합창단에서 만난 나용운 선생댁에서 가정교사를 하며 틈틈이 어깨너머 지휘와 작곡을 배우는 일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천직은 어쩔 수 없는 법. 펼치지 못한 의학에의 욕구가 다시 솟아올라 그는 결국 다시 대학문을 두드리게 된다. 1972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그의 나이 서른네살 되던 해 비로소 의학의 참 도를 깨닫게 된 것이다.

  군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으며 이종욱 원장은 보다 명확한 진로로서 정신과를 선택하게 된다. 암울했던 8년이었지만 삶에 흔들림 없는 뿌리를 내리게 해준 지난 방황이 환자들을 돌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고 그가 아끼는 음악 또한 이 분야와 관련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산 고려병원 정신과장으로 2년간 근무하던 그는 82년 여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신경정신과의원을 연다. 그리고 3년후. 마을 사람들에게 부정한 땅으로 알려져 놀리고 있던 땅을 헐값에 사들여 그가 소원해 마지않던 콘서트홀(일명 ‘조인트 홀’)을 2층에 둔 병원을 세우게 되었다. 이름하여 ‘보람의 집’. ‘클 보(甫)’에 감람나무 람(攬)자를 빌어 언제 어디서든 그윽한 향기와 너른 그늘로서 필요로 하는 모든 이에게 넉넉한 쉼터를 제공한다는 뜻으로 이 원장이 손수 지은 이름이다.

  이 원장은 음악을 통한 정신치료에 가능성을 두었지만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메마른 정서에도 치유 못지않은 훈훈함을 선물 할 수 있으리라 믿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매주 1회 사이코 드라마를 통해 환자들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며 스스로 치유의 방법을 깨닫도록 돕는 한편 연 20여회에 걸친 음악회를 지역주민에게 선보이고 있다. 또한 다양한 방법을 통한 음악치료, 일반인을 위한 정신건강 계몽 계도 공간으로써 이 공연장을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박인수, 손순남, 김원경씨 등 내로라 하는 성악가의 대부분이 이미 ‘보람의 집 조인트홀’을 통해 성심껏 연주를 펼친바 있고, 마산 창원 시민 가운데 이곳에 와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이제 이 공간은 명실상부한 주민들의 휴식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그러나 물론 처음부터 이 일이 쉽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음악치료에도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베토벤 등 성악의 훌륭한 연주가 우울증 환자들의 정서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론적인 가정 아래 환자들을 동원했지만…. 결과는 말이에요, 모두들 졸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모험하는 셈으로 당시 유행하던 유행가를 틀어주었더니 손뼉을 치며 좋아하더군요. 정신치료에는 교과서적인 해답이 없음을 깨달았지요. 지금은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점진적 치료가 이뤄지도록 다양한 방법을 도입 시행하고 있습니다.”

  지역주민의 반발과 부정적 언질도 만만치 않았다 한다. 모든 공연을 이 원장 자비로 무료 공개하고 오직 그들 자신만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성하려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병원 흥행이 주목적 아니냐’는 오해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또한 그저 ‘자선사업’으로만 인식하는 태도 또한 이 원장에겐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자선이요? 그건 가진자가 못가진자에게 베푸는 것 아닙니까? 전 그저 건조한 세상에 촉촉한 물방울 하나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함께 느끼고 호흡할 수 있다는 것. 그 시간을 통해 감정을 순화시키고 희망적인 마음 또한 얻게 된다면 그것 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요? 어떤일에도 필히 금전적인, 혹은 개인적인 목적이 있을거라고 생각하던 그분들의 마음이 제마음과 하나가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 원장은 자신의 삶을 스치던 순간들, 의료일지와 일상의 편린을 수필·시로 표현해 한권의 책으로 묶어내는 직업을 하고 있다. 그의 마음을 훌훌 털어놓을 대상으로 음악과 문학만큼 절친한 벗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까.

  이종욱 원장은 청소년을 위한 계도운동에 있어서도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근간에 와서 더욱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마약문제를 퇴치하기 위해 이미 오래 전부터 강연 및 홍보에 앞장서 왔다. 그러나 그가 주력한 것은 단순한 마약퇴치 운동이 아닌 청소년의 정서와 미래를 염두에 둔 활동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생들을 비롯해 학교 선생님들과 사회 심리학자, 경찰, 선도위원, 학부형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마음을 열고 대화함으로써 ‘죄와 벌’로 단순히 구분되는 것이 아닌, 열린 대화와 가슴으로부터의 치유가 가능해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젠 마약의 종류도 청소년 범죄의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졌습니다. 사회가 고도화되는 만큼 일하지 않고는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남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생각과 맞물려 고립된 범죄를 낳는 거죠. 그들의 방황은 제가 했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왜냐구요? 그땐 그래도 인정과 사랑이 남아 있었으니까요. 손잡고 함께 울수 있는 사람들, 열린 마음을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는 ‘아직’모든 것이 늦지 않았음을 거듭 강조한다. 공감의 끈이 이전처럼 굵고 단단하지는 않지만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이를 다시 회복시키려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함을 믿기 때문에.

  이종욱 원장은 부단히 펼쳐온 음악문화 활동과 청소년 선도 활동, 마약퇴치 운동을 통해 지난 87년 ‘대한적십자사 총재 표창’을, 91년에는 ‘경상남도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여생을 다 털어 넣어도 모자랄 일에 표창을 얻음이 오히려 부끄럽다며 얼굴을 붉히는 이 원장에게서 아직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엿볼 수 있다.

  ‘이종욱신경정신과’의 식구는 모두 스물두명. ‘우리들부터 촉촉함을 나누며 살자’는 이원장의 외침에 부응하듯 모두에게서 한식구다운 따스함을 느낄수가 있다. 가슴엔 언제나 사랑을, 얼굴엔 항시 미소를 안고 진정으로 봉사하는 병원을 만들겠다는 것이 이 원장의 포부이자 가족 모두의 다짐이기도 하다.

  5월이면 병원 개원 10주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해 음악회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그는 남은 날에 대한 작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이뤄낼 계획을 함께 들려준다.

  “황혼을 맞는 노인들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정신과 병동도 아니고 단순한 양로원도 아닌, 작업장 휴식공간 등 그들만의 공동체가 편안히 유지되는 그런 공간을 말입니다.”

  아직도 아름다운 것만 보면 주책없이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는 사람. 언젠가 ‘저 사람은 노을처럼 훈훈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면 참 좋겠단다. 그로 인해 새로운 삶을 얻은 많은 청소년들, 메마른 정신에 맑은 기운을 얻은 환자들이 먼 훗날 바로 그렇게 읊조리며 이종욱 원장을 추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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