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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떠나도 마지막 탄광촌의사로 남겠습니다"
"모두 떠나도 마지막 탄광촌의사로 남겠습니다"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5.03.1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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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방덕환 원장

·1934년 서울 용산 출생
·1959년 서울의대 졸업
· 정형외과 전문의

  지금은 그래도 교통수단과 문화시설의 구색이 갖춰져 있지만 한참 일이 많던 70?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스팔트 길 하나 없는, 기차도 완행만 겨우 들어오는 정도의 벽지가 바로 이곳 고한읍이다. 돈을 목적으로 주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만이 모여들었을 뿐 자원해서 찾아오는 전문인력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방 원장 역시 특별한 사명의식을 갖고 이곳에 온건 아니었다. 6개월 정도만 진료를 맡아 달라기에 별다른 망설임 없이 내려온 것이 14년간의 굵은 인연을 낳은 것이다.

  ■ 정선군 고한성심병원 방덕환 원장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사북에서 태백까지 이어지는 국내 최대의 탄광촌, 고한은 그 중간쯤 자리하고 있다.

 오로지 돈을 벌겠다는 각오로 몸뚱아리 하나만 의지해 모여든 사람들의 마을. 그러나 지금은 화려했던 전성기를 뒤로한 채 날로 스산해져만 간다. 한참 경기가 좋았던 80년대 초반엔 인구 4만 5,000여명을 자랑하던 것이 이제 1만여명만 남아 옛 명맥을 이어가는 정도. 산줄기마다 폐광이 늘고 동네엔 빈집이 늘어 시대가 변했음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이곳 탄광촌에 단 한명의 주인만이 남는다해도 그날까지 함께 머물겠노라는 사람이 있다. 고한성심병원 방덕환(60) 원장. 그 역시 외지에서 흘러왔음은 한가지인데 삶의 모양새만은 사뭇 다르다.

  “언제가 떠날거라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요. 무엇하려고 고향이니 타향이니 그런 걸 따지겠습니까. 14년간 머물렀고 지금도 변함없이 나를 필요로 하는 이땅이야말로 소중한 보금자리죠. 의사로서 주어진 적임을 다하며 오늘을 사는 것이 저의 유일한 의무일 뿐입니다.”

  탄광촌은 특이지역에 속한다. 주민 대부분의 연고지가 다른 곳에 있다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논 한마지기 찾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그렇다. 지금은 그래도 교통수단과 문화시설의 구색이 갖춰져 있지만 한참 일이 많던 70?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스팔트길 하나 없는, 기차도 완행만 겨우 들어오는 정도의 벽지가 바로 이곳 고한읍이었다. 돈을 목적으로 주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만이 모여들었을뿐 자원해서 찾아오는 전문인력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방 원장 역시 특별한 사명의식을 갖고 이곳에 온건 아니었다. 6개월 정도만 진료를 맡아 달라기에 별다른 망설임 없이 내려온 것이 14년간의 굵은 인연을 낳은 것이다.

  6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난 방덕환 원장은 사실 공대에 진학하길 원했다. 그러나 당시 전쟁을 겪어내면서 권위와 대우를 받는 직업으로 떠오른 것이 의사나 변호사였기에 곧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쳤다. 결국 방 원장은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의학은 배울수록 새롭고 신기한 학문이더군요. 제 적성과 그리 어긋나지도 않았구요. 시간이 지날수록 지위니 명예니 하는 것에 상관없이 의학자체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인체에 담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생명을 다루는 의사에게 정확한 판단력과 명석한 지식이 필요함은 물론이려니와 여기에 끝없는 노력, 경험, 연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되었습니다.”

  졸업후 그는 미국에서 정형외과 수련과정을 밟고 귀국, 부산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리고 나서 부산대와 서울 영등포에서 개원의로 활동하다 정부파견 아프리카 의료사절단 모집 소식을 듣게 된다. 폭넓은 경험과 보람에의 길을 찾던 그에게 아프리카는 더 없이 좋은 장을 마련해 주었다.

  비록 정부 정책하에 파견되었지만 그에겐 그런 전제보다 의사와 환자로서의 새로운 만남에 더욱 깊은 의미가 있었다. 가봉에서 2년, 그리고 자이레에서 2년. 살인적인 더위를 피하기 위해 오전8시부터 오후 1시경까지 진료를 봤는데 하루 환자수가 무려 350여명에 이르렀다고. 그뿐이 아니다. 더위가 조금 잦아드는 오후가 되면 수술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어 그야말로 24시간 의료봉사로 점철된 나날들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순수한 흑인 주민들의 위로와 격려가 있어 덕분에 의사 대접도 푸짐히 받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아프리카에서의 4년 의료봉사 일지를 접고 고국에 안긴지 얼마 안되어 방 원장은 탄광촌에서 진료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탄광이 한참 활성화되던 때라 인구가 많고 사고도 잦은 반면 이를 돌볼 의사가 부족하다는 거였다. 환경적인 어려움과는 이미 검은 대륙에서 친해진 바 있기에 그다지 어색함이 없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 검은 탄광촌 고한. 그러나 방 원장에게 이곳은 특별한 구역이 아닌 그저 환자가 있는 똑같은 진료지일 뿐이었다.

  탄광촌은 이름 만큼이나 거칠고 험한 곳이다. 다들 자기 목적에 의해 모였기에 그를 위해 억세게 일을 했고 종종 사고라도 일어나면 인적 피해상황 또한 극심했다.

  “석탄을 나르는 광차 바퀴 밑에 사람이 깔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무게와 부피가 왠만해야 말이죠. 사북에 있을 때 한사람이 두다리 모두를 깔린 일이 있는데 달려가보니 한쪽 다리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고 다른 한쪽도 뼈만 달랑 남은 채 피부는 모두 벗겨져 있었습니다. 대부분 그 정도라면 원주로 후송하지만 그땐 그럴 겨를조차 없었어요. 절단수술을 감행했죠. 물론 본인의 동의와 서명을 받은 후였습니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형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굳이 자르지 않을 수도 있었잖느냐’며 방 원장을 마구 몰아세우는 거였다. 본인이 직접 지장까지 찍었다고 했더니, 그건 의식이 없을 때 내뱉은 헛소리 내지는 강제였을 거라며 막무가내였다. 의사는 그런 순간이 가장 섭섭하단다. 온몸에 땀을 쏟아내며 최선을 다하는데 기껏 나중에 시비 협박으로 돈이나 얻어내려는 사람들이라니. 진심이 통하지 않는 바로 이런 경우의 씁씁함을 무엇과 견주겠느냐며 그는 의사들의 진정을 대변해 주었다.

  탄광촌에서 사고가 일어나면 가장 어려운 것이 수혈문제다. 친척이나 형제들 조차도 피를 나누는데 인색해 은근히 피해버리는 예까지 있다고 한다. 안그래도 이런저런 사고가 잦아 애를 먹는데 대형 매몰사고라도 겹치게 되면 정말 난감할 따름이다.

  “정 안되면 예비군을 소집해 반 강제로 수혈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땐 헌혈자에게 오후 교육을 면제해 주는 혜택이 있었거든요. ‘하나 주면 적어도 하나는 받아내야겠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대하면 섭섭하다 못해 화가 치밀곤 하던군요. 사람이란 언제 어떤 곤경에 처할지, 누구의 도움을 받게될지 모르는 일인데 눈앞에서 남의 곤경을 보면서도 기어이 숨고마는 사람들이 야속했습니다. 그 정확한 계산논리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이 정말 이익이 될까요? 날이 갈수로 세상이 재미 없어지는 것 같아요.”

  억척스레 얻은 돈을 유흥비 등에 흥청망청 쓰는 모습 역시 안쓰럽기는 매한가지. 늘 타이르고 조언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그네들의 고질병이란다.

  방 원장이 처음 부임하던 80년이나 지금이나 믿을만한 외과의사가 부족해 큰 사고라도 나면 성심병원이 제일 바쁘다. 탄광 속에서 실려나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만, 눈동자와 이빨만이 허옇게 번쩍이는 그들을 씻어내던 간호사들의 수고도 여간 아니었을 것이다.

  이성적인 논리보다는 큰 목소리와 힘이 앞서는 이곳에서 방 원장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고자 노력한다. 소속된 직장에서 좀 더 이익을 내겠다고 사실과 다른 진단서를 써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정직’을 강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환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되 정직하게 서야 할 부분에선 한치의 양보가 없다. 그래야만 모두의 앞에 공명정대하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의사란 여기에 있을 수 없어요. 환자의 대부분이 산재나 생활보호 대상자이거든요. 저에게 무슨 큰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욕심낼 것도 없구요.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않고 먹고 사는 정도면 만족스럽지 않습니까. 전 ‘정직의 도’가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직하게 열심히 다하면 하는 만큼의 대우를 꼭 받게 됩니다. 문제는 욕심이겠지요. 제겐 배운 지식을 통해 타인들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귀한 보람입니다.”

  대도시로의 주민 이주가 늘어 이제 남은 사람들도 얼마 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이주의 비율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주민들도 떠나는 마당에 간호사등 전문인력을 수급하는 일이란 더욱이 쉽지가 않다. 하지만 성심병원 스무명 직원들은 서로를 토닥이며 굳은 유대를 만들어간다. 마땅한 문화시설이나 복지시설이 없는 대신 저녁 즈음 방 원장 이하 직원들이 자리를 만들어 식사와 담소를 나누는 것이 편안한 휴식이 된다고.

  겨울이 유난히 길고 추운 이곳에서 정성으로 화초를 가꾸는 일 또한 방 원장의 소중한 취미다. 환자를 돌보는 만큼이나 화초를 키우는데 드는 정성도 지극해야 한다며 꽃을 피워내기 까지의 세심한 주의를 설명해 준다. 인생을 정성껏 가꾸는 자세. 부지런히 정직과 진심으로 삶을 일구면 결국 자신도 잘되고 주변에도 좋은 향기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집도 직장도 쉽게들 옮긴다지만 우리 세대는 그렇게 되질 않아요. 머물다보면 그곳에 뿌리내리게 되는 거죠. 푸른 산 맑은 물이 아니지만 흙이 있는 이땅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탄광촌의 전성기 쇠퇴기를 지켜본 것처럼 폐광되는 그날에도 함께 있을 겁니다. 누군가 이 사람들을 돌봐줘야 한다면 물론 제가 남아야죠.”

  올해 회갑을 치른 방 원장의 포부가 미덥다.

  유난히 길고 춥다는 고한읍의 겨울. 자꾸만 빈집이 늘어가지만 그래도 무작정 쓸쓸하지만은 않다. 고한읍의 든든한 지킴이가 성심병원에 건재하게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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