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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병원

적십자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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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0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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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적 의료활동의 기원, 적십자

요즘 들어 의료는 상품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의료계 내에서도 높아지고 있다.물론 시대와 사회가 변함에 따라 의료의 성격 규정이 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그런데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는 변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변하는 부분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부분이 대개의 경우 어떤 대상의 본질을 표현한다. 변하지 않는 의료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의료가 대표적인 인도적 활동이라는 점이다.

남아시아의 해일로 피해를 입은 지역에 전 세계의 의사들이 달려가는 것은 의료의 이러한 특징을 잘 말해준다. 물론 의사 개인의 인도적 진료활동은 의업이 시작된 이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국제적인 규모로 조직된 인도적 의료 활동이 시작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며, 그 기원이 바로 적십자 활동이다.

적십자 활동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859년 스위스의 실업가 앙리 뒤낭에 의해 창설되었다.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을 목격한 그는 적군과 아군의 구별 없이 전상자들을 돌보는 활동을 시작했고, 차츰 이러한 인도적 의료 활동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1863년 제네바에서 그 유명한 '적십자 규약'을 만들었다.

우리나라가 처음 적십자 활동에 참여한 때는 대한제국시절이었다. 당시 파리주재 공사였던 민영찬은 고종의 신임장을 갖고 적십자 제네바 대회에 참석했다. 대한제국은 1903년 1월 8일에 제네바 협약에 가입했으며, 1904년 12월에는 헤이그에 민영찬 공사를 파견하여 '병원선에 관한 협약'에 서명하였다.

이같은 일들을 통해 대한제국은 적십자라는 국제기구의 성격과 활동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1905년 10월 27일 고종이 칙령으로 '대한적십자사규칙'을 반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규칙의 반포와 함께 북서영추문(北署迎秋門, 지금의 경복궁 후문) 근처에 적십자 병원이 설립되었다가 1906년 10월에는 현재의 원남동 남쪽으로 이전하였다.

원래의 명칭은 대한적십자사병원으로 고종의 명에 의해 직접 설립되었으므로 황실의 업무를 담당하는 궁내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개원 당시에는 군의인 유한성을 비롯하여 모든 직원이 조선인이었으나 이미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있는 상황이라 이내 일본인들이 대한적십자사병원에도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은 1899년에 설립된 광제원도 마찬가지였다.

광제원은 원래 한의들이 임명되어 진료를 보았으나 을사보호조약 이후에는 점차 쫓겨나 일본인 의사들로 대치되었다. 대한적십자사병원의  초대 교육장으로 임명된 유한성도 한의 출신의 군의로 여겨진다.그러나 조선인이 근무한 것은 개원 초기의 짧은 시간에 불과했고 이후에는 광제원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이 병원의 운영을 점차 장악해나갔다.

그래서 의료진뿐 아니라 병원의 일반 직원에도 일본인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적십자사병원에서 근무하던 일본인 직원이 환자를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장동에 사는 김소사가 대한적십자병원에 8,9세 된 여아의 병을 진찰하는데, 사무를 보는 일본인 우라베가 약값 5전을 요구하니, 김소사가 말하되 이 병원에서 약값을 받지 아니한다 하기로 돈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하니 이 일본인이 곤장으로 난타하여 중상을 입혔으니, 이 여인은 년 40여에 임신 중이라 하니 이 일본인은 병실 사무를 보지 아니하고 구타 사무를 보는 것이로구나.

환자를 구타한 일본인 직원에 대한 처벌 기사는 보이지 않고 '병원사무'가 아니라 '구타사무'를 본다는 신문의 비아냥거림만이 이 부당한 처사에 대해 당시 가능했던 유일한 대응이 아니었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대한적십자병원은 개원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통감부가 기존의 의료기관을 통폐합하여 대한의원을 만들면서 없어졌다.

당시 통감이던 이토오 히로부미는 기존의 광제원과 의학교, 그리고 적십자병원을 통폐합하여 1907년 3월 15일 대한의원을 창설하는데 이로 인해 적십자병원은 대한의원에 합병되었고, 같은 해 11월 18일에 대한의원 건물이 준공되면서 진료활동도 완전히 대한의원으로 통합되었다.

더구나 한일합방을 앞두고 1909년 7월 23일에는 대한적십자사가 일본적십자사에 합병되어 일본적십자사의 한국본부가 된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적십자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처럼 일제의 강점으로 대한적십자사는 일본적십자사의 지부가 되는 수모를 겪었으나 이와는 별도로 임시정부 시절에도 적십자 활동이 이루어졌다. 당시 독립군들은 만주와 노령 등에서 무장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전투의 결과 많은 독립군 전상병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구호하고 돌볼 기구가 없어 이러한 기구를 설치할 필요성이 절박하게 대두되고 있었다. 이에 1919년 7월 13일 당시 임시정부의 내무부총장 안창호의 명의로 '대한적십자회'가 설립되었다. 적십자회는 임시정부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구호활동과 아울러 국제적인 활동에도 적극 참가하는 등 많은 사업을 벌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띠는 사업이 무력항쟁 중 부상을 입은 사람을 돌볼 간호사 양성 사업이었다. 대한적십자회는 1920년 1월 31일 상해의 프랑스 조계 내에 적십자간호원양성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자체가 어려움을 겪던 터라 기대를 걸었던 간호원 양성사업은 1기 13명을 배출한 후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이후 적십자회 활동도 극도로 위축되었다.

한편 대한의원에 통합됨으로써 막을 내린 적십자 병원의 국내 진료활동은 약 15년간 중단되다가 1923년에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의 상설진료소가 설치되면서 재개되었고 1926년에 현재의 위치에 병원 건물이 들어섰다. 이후 조선적십자병원, 경성적십자병원 등으로 이름이 바뀌다가 해방 후에 서울적십자병원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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