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9 10:33 (금)
양화진 외국인 묘지
양화진 외국인 묘지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5.03.04 10:32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교의사 헤론, 안식처에서 외국인 묘지 조성

합정동 교차로에서 주택가 가운데로 난 조금 넓은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국적인  장소에 이르게 된다. 바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이다.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특이한 양식의 교회 건물이 보이고 그 왼쪽 나즈막한 언덕에는 다양한 형태의 비석들이 늘어서 있는 묘지가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여기에는 약 500여 기의 무덤이 있는데 극소수의 한국인 무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외국인의 무덤이다. 이곳 양화진이 외국인 묘지가 된 것은 지금부터 115년 전 제중원 원장으로 있던 선교의사 헤론이 이곳에 묻힌 데서 비롯되었다. 미국 테네시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헤론은 모교의 교수직을 거절하고 선교의사가 되어 1885년 6월 20일 조선에 도착했다.

도착 직후부터 그는 제중원에서 알렌을 비롯한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진료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제중원을 시작한 알렌이 얼마 후 선교사에서 외교관으로 전직하여 제중원을 떠나자 헤론이 제중원을 맡아 운영하였다.

사실 헤론과 알렌 사이에는 적지 않은 불화가 있었다. 그 불화의 내용은 확실치 않지만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모교 교수직을 거절하고 온 헤론의 자부심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한다. 헤론은 알렌이 1887년 10월 조선의 초대 주미전권대신으로 부임하는 박정양을 따라 참찬관의 자격으로 귀국하자 알렌의 뒤를 이어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을 뿐 아니라 고종의 어의로 임명되었다(헤론을 고종의 어의로 임명하는 교지가 현재 숭실대학교의 기독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헤론은 제중원에서의 진료, 어의로서의 활동과 함께 전임자 알렌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서울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진료도 맡았다. 또 헤론은 진료 이외에도 성서 번역사업을 비롯하여 기독교 문서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성서 출판을 위해 1887년 조직된 성서 번역 상임위원 4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기독교서회의 창립자이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헤론은 1890년 여름 다른 선교사 가족들과 함께 더위와 전염병을 피해 남한산성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환자가 생기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왕진을 갔다. 그러던 중 거기서 헤론은 이질에 걸렸는데 처음에는 크게 심각하지 않았으나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3주 동안 심하게 앓다가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두고 1890년 7월 26일 남한산성의 한 외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헤론이 사망하자 외국인 묘지를 선정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헤론을 선교회 구내에 묻자는 의견도 나왔으나(임시로 그를 미국 공사관 구내에 묻었다는 기록도 있다) 관습상 사대문 안에 사람을 매장하는 일은 금기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하였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성난 조선인들이 몰려와서 불을 지를 것이라고 일부 선교사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그 금기는 강했다. 사실 헤론 이전에 조선에서 사망한 일부 외국인들을 묻은 묘지가 이미 인천항 해안 언덕에 조성되어 있었다.

지금은 인천이 서울에서 지척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교통이 좋지 않던 당시 서울에서 인천은 결코 가까운 길이 아니었다. 더구나 7월 염천에 헤론의 시신을 인천까지 옮기기 곤란했다. 이에 미국공사관과 알렌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 5개국 공사와 공동으로 서울 중심에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한강변의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허락해줄 것을 조선정부에 청원했다.

그리고 이 청원이 받아들여져 헤론은 이곳에 묻힐 수 있게 되었다. 원래 양화진에 인접한 한강 연안과 잠두봉은 예로부터 승경으로 이름이 높아 풍류객들이 즐겨 머물던 장소였다. 그리고 양화진은 송파진, 한강진과 함께 삼진 중의 하나로 나루터의 구실뿐 아니라 외침과 민란에 대비하여 상비군을 주둔시키던 곳이기도 했다.

수도 방위를 위해 한강 연안에 설치한 일종의 군사기지였던 셈이다. 그러다가 한말 대원군의 병인박해로 천주교 신자들이 대거 처형당하는 참혹한 일이 일어나면서 '절두산(切頭山)'이라는 끔찍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지금 그 장소는 천주교의 성지가 되어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그뿐 아니라 제중원 설립의 계기를 제공한 갑신정변의 주도자인 김옥균의 시신이 후에 이곳에서 효수되기도 했다.

사실 양화진은 내한한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친숙한 곳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이 서울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대개 인천까지 큰 배를 타고 들어와서 작은 배를 갈아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양화나루에서 내린 다음 육로로 서울에 입성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선교사들이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등 각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떠날 때도 양화나루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연유로 선교사들이 양화진 언덕에 땅을 사서 여름 별장을 지은 일도 있었다. 헤론 이후에는 많은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양화진에 묻혔다.

의료선교사들만 꼽아 보더라도 제중원 부인과에서 일했던 여자의사 에바 필드, O. R. 에비슨의 아들로 세브란스 소아과 교수를 지낸 D. B. 에비슨, 그리고 해주 결핵요양원과 결핵 씰 사업으로 우리나라 결핵 사업과 여성의료인력 양성에 크게 공헌한 홀 일가 등이 모두 이곳에 묻혀있고, 의료선교사는 아니지만 아펜젤러나 언더우드와 같이 낯익은 선교사들도 이곳에 묻혀있다.

그렇다고 이곳에는 선교사들뿐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찾았다가 이 땅에서 세상을 떠난 많은 외국인들이 이곳에 묻혀있다. 사람 없는 한적한 오후, 사자들이 편안히 쉬고 있는 묘지를 거닐며 이들이 참여했던 한국 근대사의 장면들을 떠올려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