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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성누가병원과 랜디스
제물포 성누가병원과 랜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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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0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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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을 기뻐하는 병원, 낙선시의원

쇄국정책을 펴던 조선이 개항을 하자 개항장이었던 제물포(인천)는 해외로부터 사람이나 물자가 들어오는 관문이 되었다. 당시 서울로 들어오는 외국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제물포를 통해 들어왔다. 그런 이유로 제물포는 일찍부터 서양의 문물에 노출되어 있었고 외국인들의 출입과 거주도 많았다.

그래서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가 생겨나기 이전에 이미 제물포에는 외국인 묘지가 조성되어 있을 정도였다. 또 이러한 배경으로 제물포에는 서양 의료기관도 상당히 일찍부터 세워졌다. 비록 일본 거류민들을 위한 병원이기는 했으나 개항 직후에 부산, 원산과 더불어 제물포에 일본인 병원이 세워지기도 했다. 이보다 조금 나중이기는 했지만 성공회에서 설립한 누가병원이 제물포에 세워진 것은 1890년이었다.

성공회는 조선에 선교사업을 시작한 여러 선교회들 가운데서도 상당히 일찍 선교사업을 시작했고 미국의 북장로교와 감리교보다는 늦었지만 의료선교 사업도 상당히 일찍 시작했다. 성공회에서는 서울의 낙동과 정동, 제물포와 강화도 등지에 진료소를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의료선교 사업을 했으나 의료인력과 자금의 부족으로 이들 진료소를 모두 유지하지 못하였다.

특히 서울의 경우 북장로교에서 제중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었고, 그 외에 감리교에서도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소규모의 진료소를 운영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1904년에는 서울의 진료소 두 곳의 문을 닫고 제물포의 누가병원 운영에 집중했다.

성공회의 의료선교, 특히 제물포 지역의 의료선교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랜디스이다. 랜디스는 알렌이나 에비슨, 스크랜튼 등과 같이 널리 알려진 의료선교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의료선교사로서 그의 헌신적 활동뿐 아니라 그의 학문적 업적은 특별히 기억될 필요가 있다.

랜디스(E. P. Landis, 1865~1898)는 영국성공회 소속의 의료선교사로 원래 미국에서 태어나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의대를 졸업하고 잠시 고향에서 일했던 랜디스는 뉴욕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그는 막 주교로 임명을 받은 후 조선으로 가기 위해 미국 대륙을 횡단하려던 코프 주교를 만났다.

코프 주교를 만난 랜디스는 조선에서 선교사업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조선의 초대 주교 코프와 함께 1890년 9월 29일 내한했다. 미국인인 랜디스가 영국 성공회 소속으로 내한하게 된 이유는 그와 같은 것이었다. 랜디스는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한 1898년 4월 16일까지 약 7년의 시간을 조선에서 보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랜디스는 많은 일을 했다.

내한 직후 랜디스는 전세 낸 집에서 방을 한 칸 임시 진료소로 개조해 사용하다가 이듬해 코프 주교가 세워준 작은 진료소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 진료소는 한옥집에 설치된 것으로 외국인 거주지의 바깥에 자리 잡고 있었다. 랜디스는 제물포의 세관에서 검역담당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러한 의료사업 외에 그는 불쌍한 고아들을 모아 돌보기 시작했다.

랜디스는 1895년 연말에 안식년을 떠나는데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듬해 5월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돌보던 고아들을 그냥 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병원 부속고아원을 운영하면서 입양한 고아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고아원 사업 이외에도 맹인을 위한 점자책을 발간하고 맹인학교를 세울 계획까지 가졌지만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실현시키지는 못 했다.

랜디스는 이러한 따뜻한 마음과 함께 지극히 학구적인 관심도 갖고 있었다. 그는 의료선교사로서의 활동 이외에도 한국의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를 했다. 그는 많은 학술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했고 여러 학술지에 기고를 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전래속담, 풍수, 수 개념, 장례의식, 귀신 쫓는 풍습 등 한국 문화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랜디스는 당시 한국에 있던 서양인들 중에 가장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한문에도 밝았는데 중국식 음이 아니라 한국의 전통적 방식으로 한문을 배웠다. 그의 동료 선교사들은 저녁마다 그의 병원을 지나갈 때면 그가 논어와 맹자를 진짜 한국식으로(in true Korean fashion)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한문을 배운 그는 자신이 근무하던 제물포의 성누가병원(St. Luke's Hospital)을 '선행을 기뻐하는 병원(The Hospital of Joy in Good Deeds)'이란 의미의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으로 직접 작명하기도 했다.

랜디스는 이러한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다른 의료선교사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국 전통의학의 성전으로 여겨지는 동의보감의 번역이었다. 물론 33세의 나이로 요절했던 랜디스는 그의 짧은 생애 동안 방대한 양의 동의보감을 전부 번역하지 못하고 일부만을 번역했다. 그리고 그는 이 번역된 원고를 그가 죽던 해인 1898년 당시 홍콩에서 발행되던 중국학 잡지 The China Review에 실었다. 랜디스가 번역한 부분은 동의보감 가운데 각종 약재를 서술한 양액편으로 그 중에서도 어부(魚部)의 일부와 충부(蟲部)의 내용 거의 전부이다.

1897년 연말 랜디스에게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자신이 일하고 있던 누가병원을 새로 증축할 자금이 기부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랜디스는 기쁜 마음에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공사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33세라는 젊은 나이였다.

병원 공사는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어 드디어 1899년 10월 서양식 벽돌건물의 병원이 완성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최고의 시설을 갖춘 병원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성누가병원은 후에 성공회의 교회로 바뀌었고 지금 그 자리에는 랜디스의 활동을 기리는 비석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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