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8 17:57 (목)
대한의원
대한의원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5.02.23 09:44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한의원은 누구를 위한 기관인가

이런저런 이유로 늘 떠들썩한 대학로에서 서울대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불가사리 모양의 커다란 병원 본관 건물이 나오고 그 앞쪽에 고풍스런 양식의 서양식 건물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대한의원 건물이다. 대한의원의 관제가 발표된 것은 1907년 3월 13일이지만 그 건립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그 전 해인 19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든 일본은 조선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당시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던 정치인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한국통감으로 임명하였다. 통감부 시절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기 이전으로, 실질적인 통치는 통감부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형식적으로는 대한제국 정부가 존속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통감인 이토오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대신들과 함께 '한국 시정 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구성하여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필요한 사항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물론 이는 형식적인 모임으로 명칭은 협의회이지만 내용상으로는 통감부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조선의 의료 문제에 관한 논의가 처음 이루어진 것은 1906년 4월 9일에 열린 제3차 협의회에서였다. 통감의 관저에서 열린 이 회의에 당시 한국 측에서는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참정대신 박제순, 법부대신 이하영, 탁지부대신 민영기,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수도사업, 치도사업, 사법제도 개편 등 여러 현안들이 논의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의료기관 정비에 관한 내용도 들어있었다. 특히 병원통합 논의는 의료부문의 핵심의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통감인 이토오 히로부미는 다음과 같은 병원 통합안을 제시했다. "경성에는 한성병원과적십자 병원이 있고 내부 소속의 광제원이 있고 학부 소속의 의학교 부속 병원이 있다고는 하나 전문적으로 병원의 체계 설비를 가진 병원은 한성병원뿐이다. 다른 세 병원은 어느 것이나 규모가 작고 분립되어 사회에 도움 되는 것이 적으니 통합해 적십자 병원의 하나로 하면 규모가 완전한 것으로 될 것이며, 종두사업과 같은 것도 신설 기관에서 하는 것이 옳다."

즉 일본 거류민을 위한 병원인 한성병원을 제외하고 대한제국에서 세운 광제원, 적십자병원, 의학교 부속병원을 적십자병원 하나로 통합하고 종두사업도 이곳에서 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토오 히로부미의 논리는 작은 규모의 병원들이 여럿 있는 것보다는 제대로 된 병원 하나가 있는 것이 더욱 낫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내부대신 이지용은 기존에 각 지역의 종두소에서 운영하던 종두사업을 적십자 병원으로 옮기도록 하겠다고 했고, 이완용은 한술 더 떠서 의학교 부속병원뿐 아니라 아예 의학교까지 새로 생길 기관에 통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어 이토오 히로부미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화답하였다. 그리하여 이 회의에서 광제원, 의학교와 그 부속병원, 적십자사 병원 등 기존의 의료기관을 적십자사 병원으로 확대시켜 통합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런데 이러한 의료기관 통합 결정에 대한 일반여론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의료기관 통합에 반대했다. 즉 의료기관이란 많을수록 좋은 법인데 그나마 몇 개 되지도 않는 의료기관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면 국가에서 운영하는 기관이 전국에 오직 하나만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 하나의 의료기관으로 어떻게 모든 사람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겠는가.

교육기관이건 의료기관이건 확장시켜 그 혜택을 널리 펼쳐야할 터인데 오히려 정부의 높은 관리들이란 사람들이 나서서 이들을 축소시키는 데 앞장서니 통탄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세간의 이같은 비판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의료기관의 통합작업은 통감부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리고 일본 육군 군의총감인 사토오를 초빙하여 통합작업의 책임을 맡겼다.

1906년에 발간된 <한국시정일반>에는 그 진행과정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의료기관의 통합을 위하여 통감은 사토오 육군 군의총감에 촉탁하여 그 임무를 맡기기로 하여 동 총감은 천황의 임명을 받아 1906년 7월 3일 경성에 도착한 이후 고야마 기사, 고다케 경성의학교 교사, 사사키 광제원 의장…등 7인으로 위원회를 조직하여…경성 동소문 내의 장소를 부지로 하여 명년 중에 낙성할 예정으로 공사에 착수하였고, 통감이 친히 이를 대한의원이라 명명하였다."

병원 신축 부지로는 서대문 밖 화약제조지, 용산 등 여러 곳이 거론되었다. 그러다가 동소문 내의 현 장소로 결정되었다. 사토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행히 함춘원 남쪽 언덕을 부지로 골랐다. 비록 동북쪽에 치우쳐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역이 높고 건조하며 수목이 울창하고 공기와 물이 깨끗했기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나았다."

공사는 1906년 8월부터 시작되었으며 원래 준공예정은 이듬해인 1907년 8월 31일이었다. 그러나 1907년 7월과 8월에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으로 말미암아 정국이 혼란해져 공사의 진행도 지연되었다. 그래서 1907년 11월 병원 본관 건물이 완성되었고 나머지 부속 건물까지 대체로 완성된 것은 이듬해인 1908년 10월 경이었다. 즉 병원 건축에 약 2년이 넘게 걸린 셈이었다 (당시 병원 건축의 각 과정을 담은 사진들을 모아 사진첩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서울대학 병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대한의원의 개원식은 주요 건물이 모두 완성된 1908년 10월 24일에 열렸다. 병원 건축에는 총 40만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이 돈은 모두 차관의 형식으로 제공된 조선 정부의 빚이었다.

1907년 5월 5일 <대한매일신보>는 "우리가 병원과 의학교 설립을 전진이라 생각하지만 병원을 국고로 유지하는 것에는 반대하며, 결국 큰 병원을 짓는 것이 빈한한 다수 일본 의사에게 봉급을 주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며 대한의원이 누구를 위한 기관인가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다.

대한의원 건물은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병원 박물관도 있어 우리나라 의학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한번쯤 방문해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