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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약령시

대구 약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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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2.16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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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약재의 역사

약령시는 필자에게 무척 익숙한 곳이다. 어린 시절 그 한가운데 있는 교회에 다닌 때문이다. 집도 그곳에서 멀지 않았다. 집을 나와 큰 길을 하나 건너면 바로 약령시 골목의 초입이었다. 대구 사람들은 그곳을 약전골목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길 양편으로 한약방이 죽 늘어서 있어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뭔지 모를 한약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우스갯소리로 감기에 걸려도 약전골목을 지나가면 감기가 떨어진다고 했다. 길가에는 각 한약방에서 말리기 위해 내어놓은 한약재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약초들이야 뭐가 뭔지 몰랐지만 약재로 쓰는 신기한 동물들은 어린 필자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교회로 오가는 길에 한약방 앞에 멈춰 서서 지네나 뱀 말린 것, 거북이 등껍질, 천산갑 등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기억이 난다. 작두로 약재를 자르고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기계로 녹용을 얇게 자르던 모습도 떠오른다. 가끔은 한약방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었다. 바로 옆집에 살던 할아버지가 약전골목 안에서 한약방을 운영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마음씨 좋게 생긴 그 할아버지는 사실 가까이 살던 사촌동생의 외할아버지였다. 가끔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약을 지어 보내주시곤 했다.

다시 약령시를 찾은 것은 늦은 가을의 토요일 오후였다. 거의 10년만이었다. 그동안도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에는 빠짐없이 대구를 찾았지만 예전에 다니던 교회가 10여 년 전 다른 곳으로 옮겨간 이후로 이 골목을 일부러 다시 찾을 일이 없었던 까닭이다. 골목 초입을 들어서니 여전히 강한 한약재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그전 아스팔트이던 길바닥이 작은 블록으로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한약방, 한의원, 약업사 등 다양한 이름을 단 가게들이 예전과 다름없이 길 양편으로 늘어서 있었다. 토요일 늦은 오후라 그런지 문을 닫은 곳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고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어 다소는 썰렁한 느낌마저도 들었다. 예전의 교회는 거리의 중간쯤에 있었다. 본당 건물은 1933년에 지은 벽돌건물인데 우여곡절 끝에 건물만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본당 바로 옆, 예전 교회의 부속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약령시 전시관이 들어서 있었다. 전시관 마당에는 작은 약초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쉴 수 있는 자리들도 마련되어 있었다.

전시관은 3층 건물이었다. 1층은 한약재도매시장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전시관은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약령시의 역사며 각종 한의서들, 무엇보다도 이름으로만 듣던 다양한 한약재들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장은 의외로 넓었다. 늦은 토요일 오후, 그나마 골목 안으로 들어가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이 전시관을 찾은 사람은 필자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반쯤 보았을까. 혼자서 천천히 구경을 하고 있는데 웬 남자가 오더니 토요일은 오후 5시에 문을 닫으니 빨리 보고 나가주었으면 하는 의사를 표해왔다.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 나머지 약재 전시물들을 대충 둘러보고는 전시관을 빠져 나왔다. 대구에 약령시가 생겨난 정확한 시기는 알지 못한다. 효종 때인 17세기 경이었다고 하나  대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시장의 기원을 따지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약령시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제시되고 있는 형편이다. 원래 시장이 서던 자리는 여기가 아니고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경상감영의 객사 주변이었다.

경상감영이 있던 자리는 지금 경상감영공원이란 이름의 도심공원으로 바뀌어있다. 이 공원은 예전에 중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그림을 그리러 자주 가던 곳이었다. 약재 시장은 객사 근처 천여 평에 이르는 공터에서 봄과 가을로 크게 열렸다. 시장이 열리면 전국 8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큰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대구 이외에도 전주, 원주 등지에 약령시가 생겼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문을 닫고 대구약령시만이 번영을 누렸다. 대구 외에도 전국 여러 곳에 약재시장이 있었지만 대구의 약령시가 규모나 거래되는 양에 있어 가장 컸다. 전국에서 모여든 약재가 약령시를 거쳐 다시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그래서 개성인삼도 약령시의 바람을 쐬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였다. 거래 규모가 컸던 만큼 큰 손도 적지 않았는데 개성상인들이 약령시도 좌우했다. 김홍조라는 개성상인은 약령시를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실력자로 유명했다. 그 해의 약재 시세는 김홍조에 의해 결정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단순히 국내에서만 거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약재는 중국과 일본으로도 팔려나갔다. 이처럼 국제적인 거래망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그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입수할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당재(唐材:중국에서 수입한 약재)의 가격이 오를 것을 예상한 그는 전국의 당재를 모두 끌어 모으고 그렇게 모은 당재를 화물열차를 이용해 대구로 운반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과의 교역이 금지되고 당재의 수입 역시 금지되었다. 김홍조만이 당재를 쌓아두고 있었으므로 그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약령시가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은 1908년이었다. 경상감영 객사 주변의 넓은 자리를 두고 다소 좁은 지금의 남성로 일대로 옮긴 것은 당시 친일파로 관찰사 서리이자 대구군수였던 박중양 때문이었다. 그는 객사를 일본 거류민단의 아이들을 위한 소학교로 제공하기 위해 약령시를 남문 밖으로 강제 이전시켰다. 박중양은 이전에도 일본인들의 요구에 따라 대구읍성을 헐어버려 많은 비난을 산 적이 있었는데 약령시의 강제 이전으로 또 한 차례 거센 반발에 직면해야 했다. 거센 반발로 인해 다시 이전의 장소로 환원되는 우여곡절을 거쳤으나 결국 약령시는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일제 시대에도 한약재의 거래는 여전히 약령시에서 이루어졌다. 다만 한때 문을 닫았던 전주의 약령시가 다시 개설되고 진주에서도 약령시가 개설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대구의 약령시는 1923년에 약령시 진흥회를 발족시켜 대구약령시의 활성화를 꾀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약령시를 통한 한약재의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나 일제 말기인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던 일제는 총동원령을 내려 약재의 사적인 거래를 전면적으로 금지시켰고 그에 따라 대구약령시뿐 아니라 전국의 약령시들이 문을 닫아야했다. 해방 이후 다시 문을 연 약령시는 최근 들어 상인들의 노력과 약령시를 지역의 명소로 만들려는 시의 지원으로 활성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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