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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19 21:53 (금)
재동 제중원

재동 제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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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2.16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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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안국동 로터리에서 감사원이 있는 삼청동 쪽으로 올라가는 길 좌우에는 한옥마을로 유명한 가회동이나 재동과 같이 오래된 작은 동네들이 있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왼편에 헌법재판소가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올해는 다른 어느 때 보다도 헌법재판소에 전 국민의 눈과 귀가 쏠린 한 해였다. 대통령 탄핵이라거나 수도 이전과 같은 큰 정치적 사안들에 대한 최종 판결이 이곳에서 내려졌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를 후세의 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는 알 수 없으나 헌법재판소가 자리 잡고 있는 이 장소는 우리에게 한국근대의학의 발상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이 이곳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1884년 9월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의사 알렌은 중국을 거쳐 조선에 입국했다. 의료선교사로 활동하기 원했던 그는 애초에 중국에 갔으나 중국은 이미 선교사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는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몇 해 전에야 개항한 이 나라라면 그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선은 개항은 하였지만 무시무시한 천주교 탄압의 기억이 아직 생생할 때였고, 개신교라 하더라도 공개적인 선교활동은 어려운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선교사가 아니라 미국 공사관 소속의 의사로 입국했다. 선교활동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조선에 와 있던 외국인들을 진료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러던 중 뜻하지 않던 기회가 찾아왔다. 20대 초반의 젊은 급진 개화파들이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우정국 낙성식 연회장에서 시작된 이 정변의 와중에 왕비의 조카 민영익은 칼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호출을 받아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달려간 알렌은 이제껏 조선인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외과적 치료술로 민영익의 상처를 치료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를 기회로 왕실과 친분을 쌓은 알렌은 서양식 병원의 설치를 건의했고 마침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던 조선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 1885년 4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문을 열었다. 광혜원은 약 보름 후에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왜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바꾸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아마도 단순히 자선기관의 냄새를 풍기는 광혜원보다는 좀 더 의료기관의 느낌을 주는 이름을 주기 위해서가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다. 후에 제중원이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자 북장로교에서 평양과 대구에 만든 병원의 이름도 모두 제중원이라 붙였다.

새로운 의술을 시술하는 병원이 문을 열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신통한 효과가 있다는 서양의 의술을 경험해보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알렌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 해 동안 알렌은 만 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했다. 처음 문을 연 병원에는 정말로 아픈 환자들뿐 아니라 이상하게 생긴 외국인과 그들이 펼치는 신기한 의술을 구경하기 위해 온 구경꾼도 많았다. 이들로 인해 병원이 북새통을 이루자 입장권을 발매해 표를 산 사람들만 병원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웃지 못 할 일도 일어났다. 그 외에도 이 새로운 병원과 관련된 일화는 많다. 서양의사는 무엇이든 고칠 수 있다고 믿은 나머지 이미 멀어버린 한쪽 눈을 고쳐 달라고 떼를 쓴 노파도 있었고, 고장 난 시계를 들고 와서 고쳐달라고 하는 사람, 심지어는 이미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한의사들 중에도 치료를 받고 치료결과에 만족해 자신도 서양의학을 배우고 싶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제중원에 대해 좋은 평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제중원의 서양의사들이 아이들을 잡아먹거나 눈알을 빼어 그것으로 약을 만든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병원의 운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알렌은 이듬해인 1896년 3월 29일 의학교를 열고 학생들을 뽑아 의학교육을 시작했다. 경쟁시험을 거쳐 16명의 학생들을 선발해 의욕을 갖고 의학교육을 시작했으나 아쉽게도 이들 중 의사로 활동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조혼을 하는 당시의 풍습 상 가정을 가진 학생들이 많았고, 비록 약간의 숙식비가 제공되기는 했지만 수입도 없이 장기간의 의학공부를 하기는 어려운 일이어서 중도에 포기한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 본격적으로 의학공부를 하기 전에 의사소통을 위해 영어를 먼저 가르쳤는데 당시에는 영어를 하는 인력이 귀할 때라 언어만 어느 정도 습득하면 다른 곳에서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어 더 이상 힘든 의학공부를 계속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의학당 학생 모집 당시 조건으로 내건 것이 졸업 후에는 정부의 주사로 취직을 시켜준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행적이 알려진 이들 입학생 중 상당수는 후에 정부의 관리로 일했다. 재동의 제중원은 장소가 좁아져 1886년 후반, 혹은 1887년경에 구리개로 이전했다. 결국 재동의 제중원이 병원으로 기능한 것은 길어도 2년 남짓한 기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제중원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고 그 이후 에비슨이 맡을 때까지 상당 기간 제중원의 활동은 많이 위축되었다. 처음 제중원을 시작한 알렌이 선교사에서 외교관으로 전직을 하며 제중원을 떠났고, 그의 뒤를 이어 제중원을 맡은 헤론도 이질로 뜻하지 않게 일찍 죽는 등 제중원의 운영을 원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원래 제중원 건물은 홍영식의 집을 개조하여 만든 것이었다. 홍영식이 제중원 설립의 계기를 제공한 갑신정변이 일어난 장소인 우정국의 참판이었고, 그 자신 갑신정변의 주동자 중 하나로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참살당한 사실을 돌이켜보면 그의 집에 제중원이 들어선 것은 묘한 역사적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재동의 제중원 건물은 일제시대에는 경기여고의 기숙사 사감실로 사용되었고, 해방 후에 경기여고가 이전하면서 창덕여고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이 헐린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창덕여고의 1957년 앨범에 실린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 건물의 사진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950년대 후반 무렵에 헐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건물은 이제 사라졌으나 그나마 그 건물 옆에 서있던 600년 넘은 백송이 여전히 헌법재판소 뜰을 지키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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