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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약방거리 구리개
을지로 약방거리 구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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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2.1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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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 명동거리?

우리가 무심코 지나다니는 익숙한 거리들에 의외의 역사적 사연이 깃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기로 이름난 명동거리 또한 그런 곳의 하나이다. 구리개는 지금의 명동성당에서 북쪽의 을지로에 접하는 언덕 지역을 말하는데 이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의료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지역이었다. 현재 을지로 2가와 수표동, 장교동에 걸쳐 '혜민서골'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이는 이곳에 혜민서라는 대민의료기관이 조선시대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혜민서는 1392년 조선이 개국되면서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혜민국으로 설치되었다가 1466년에 혜민서로 개칭된 후 약 400년 동안 서울 지역 서민들의 질병 치료를 담당했던 유서 깊은 기관이다. 지금은 서울 지역의 약재상들이 경동시장에 모여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혜민서 가까이 있던 구리개 일대에 모여 있었다. 병원 근처에 약국이 모여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한말 감리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시병원에서 근무한 버스티드는 구리개의 거리 모습과 한의원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공당골을 지나 남대문로를 가로지르면 구리개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많은 수의 의원이나 한의들을 볼 수 있다. 한약방 표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종이로 된 창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가운데 부분에 더 작은 창이 있으며 작은 막대기에 걸려있다. 거리의 양편은 의원과 약방이 늘어서 있다. 우리는 이 업종에서 오가는 돈의 규모에 대해 계산해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한 유명한 의원으로 들어갔다. 방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강한 한약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리개 거리에 대한 묘사는 이제 한의원 내부의 풍경 묘사로 이어진다.

마루에는 나이 든 의사가 조수들에 둘러싸여 앉아있다. 조수들은 약재를 갈아 가루를 내고 처방전에 따라 약을 준비한다. 의사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며 진지한 대화를 시작한다. 그는 이 업종에 오랫동안 종사해 의술에 능통하며 그의 의원은 사용되는 수많은 약초와 약재들이 잘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위에는 말린 약초와 나무껍질과 가루약으로 가득 찬 종이 봉지들이 많이 매달려있다. 그 중 일부는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며 나머지는 조선 땅에서 나는 것이다. 각 봉지의 바닥에는 한문으로 약의 이름이 적혀있다. 방은 여덟 자와 열두 자로 크지 않은데 약상자와 약봉지들이 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자물쇠로 잠근, 귀한 약초를 보관하는 상자 위에 앉아 인상 좋은 친구와 함께 조선의 의술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이처럼 구리개는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의원과 약방거리였다. 재동의 제중원이 장소가 협소해지자 구리개로 병원을 옮긴 것 또한 구리개의 이러한 성격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사실 대구 지역 최초의 의료선교사 존슨이 제중원(북장로교에서 개설한 병원에는 모두 제중원이란 이름을 붙였다. 평양에도 제중원이 있었다)이란 이름의 진료소를 처음 개설한 곳이 바로 유명한 대구 약령시 안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위치 선정은 이해가 간다. 사실 조선 정부는 제중원의 설치를 얼마 전에 폐지한 혜민서와 활인서의 부활로 생각했다. 따라서 알렌이 제중원의 이전을 조선 정부에 요청하였을 때 조선 정부가 혜민서 부근이자 약재상이 많은 구리개 지역으로 허락한 것은 이러한 대민구료사업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리개로 이전한 제중원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였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우선 지금의 명동 외환은행 본점 자리가 제중원의 터였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지금 그 앞에는 과거 제중원 터였다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그 외에 명동성당 맞은 편 지금의 로얄 호텔 자리였다는 설도 있다. 한편 1903년에 간행된 '한국경성전도'에는 '제중원전'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제중원의 출입문은 현재의 명동성당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을지로 도로와 인접하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상의 단서들을 종합해보면 구리개 제중원의 병원 건물은 현재의 외환은행 본점 건물의 동쪽 일부와 주차장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전한 후 제중원은 얼마나 넓어졌을까? 정확한 넓이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가지 자료를 토대로 종합해보면 최소 이천 평에서 최대 오천 평에 이르는 넓이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재동 시절 병원의 넓이가 약 팔백여 평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최소한 두 배 이상은 넓어진 셈이다. 이 곳은 1904년 세브란스의 기부로 지금의 서울역 앞에 새로운 병원이 지어질 때까지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병원이 넓어진 만큼 병원에 필요한 여러 시설들이 존재했다. 기록에 따르면 병실뿐 아니라 입원 환자의 식사를 마련하는 부엌과 세탁실, 수술실 등이 있었다. 그밖에도 주병동, 대기실, 대진료실, 창고 등의 명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진료 공간이 어느 정도 세분화되고 구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의 어의로 있으며 제중원에서 진료를 도왔던 독일의사 분쉬에 의하면 구리개 제중원에는 약 40개의 병상이 있었다. 이 제중원 구내에는 교회도 있었는데 도산 안창호가 바로 이 제중원 구내 교회에서 1902년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구리개 제중원 건물은 1904년 제중원이 남대문 밖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전하면서 정부에 환수되었다. 환수 후 구리개 제중원의 건물과 터는 의료와는 무관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 환수 과정에서 당시 조선에서 세력을 넓혀가던 일본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는데 그들은 환수된 제중원 터와 건물을 자신들의 용도에 맞게 사용했다. 건물의 일부는 조선인 고위관리와 일본 외교관, 군인들의 사교장소인 대동구락부로 사용했고, 또 일부 건물은 당시 외부(오늘날의 외무부)의 고문관으로 있던 스티븐스의 관사로 사용했다. 스티븐스는 원래 일본 외무성의 고용원으로 있던 자로 일본의 추천에 의해 1904년부터 1908년까지 우리나라의 외부 고문관으로 있으며 일본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하는 행태를 보이다가 장명환 의사에게 저격당한 인물이다. 오늘날 유행과 금융의 중심지인 명동거리를 걸으며 백 년 전 구리개의 병원과 약방 거리를 떠올리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 전까지 명동성당 옆에 성모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고, 명동 거리 한 쪽에 성형외과를 비롯한 많은 의원들이 모여든 것도 이런 역사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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