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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신년]남한과 북한의 보건의료/남한 의사로 살고보니…
[2002신년]남한과 북한의 보건의료/남한 의사로 살고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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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1.02.02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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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화(성애병원 전공의)

남한 의사로 살고보니…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건 남한 행을 택한 것이 1997년 5월의 일이니까 어느새 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지금도 긴장과 기대가 복잡하게 뒤섞인 가슴을 안고 김포공항 활주로에 내려서던 그때가 눈에 선하다.


필자에게는 `남북한 통일 의사 1호', `의사 출신 탈북자', `인턴 과정 밟는 전 평양의대 교수' 등 여러 가지 수식어가 따라붙고 있다 북한 의사 출신으로 처음 남한에서 의사 면허를 취득했기 때문에 이러한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1980년 7년 과정의 평양의학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북한의 6∼7년제 과정의 의학대학은 모두 11개가 있다. 이외에 4∼5년제인 평양외과단과대학과 남포의학단과대학 등이 있으며, 4년제인 평성의학고등전문학교, 강계의학고등전문학교, 청진의학고등전문학교 등이 있다. 북한의 의료인력은 의사, 부의사, 준의사, 고려의사, 위생의사 등의 상급 보건일꾼과 약제사, 간호원, 조산원, 보육원 등 중등 보건일꾼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의학대학에는 의학부와 구강학부 등 본학부 외에 야간 및 통신학부가 설치돼 있어 각 도에 설치돼 있는 의학전문학교 출신의 준의사들이 의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이와 함께 고려의학부, 약학부, 위생학부에서 동의사, 약제사, 위생의사를 배출하고 있다. 의사자격은 일정한 교육과정을 마치고 국가시험을 치러 합격해야 하는 남한과 달리 재학 중 의사자격에 필요한 과목별 시험을 합격하는 것으로 주어진다.

필자는 평양의학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본교 연구원 교원 양성반을 거쳐 1980년 8월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중국 베이징언어학원에서 1년 동안 기초한어 과정을 마친 후에는 2년 과정의 베이징중의학원 침구-추나학부에 입학, 침구-추나 의사 과정을 수료했다. 1984년 8월 북한으로 돌아간 후에는 평양의학대학 교원을 거쳐 1987년부터 1992년까지 평양의학대학 과학연구부 박사원에서 신경병학을 전공했다. 당시 제출한 의학준박사(남한의 석사학위에 해당) 논문이 `심장주기 변동의 정상치와 이를 식물신경부조화증의 진단과 치료에 이용하기 위한 임상적 연구'였는데 부지기수로 밤을 새워가며 연구 논문을 썼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의학준박사 논문을 통과한 후에는 1992년부터 1995년 3월까지 상급교원 및 상급연구사로 재직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체코와 북한의 보건의료 분야 협력을 위해 설립된 체코-조선 동양의학치료센터에 의사로 파견돼 근무하면서 서방세계와 접할 수 있었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20년 넘게 의학을 공부하고 평양의학대학 상급교원의 위치에 오르면서도 풀지 못했던 학문적 한계에 대한 갈증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유 세계에 대한 기대가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오랜 고민 끝에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한국 행을 결심하고, 주변을 하나씩 정리하면서도 끝까지 북한에서 취득한 의사 자격증과 졸업증을 품속에 소중히 갈무리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한국에서의 새로운 출발은 예상보다 험난했다. 첫 난관은 북한에서의 의사 자격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 동안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했다. 의대를 졸업하면 의사 자격이 주어지는 북한과는 한국은 의사국가시험이라는 면허제도가 있고, 의학교육체계나 진단 및 치료기준 등 세부적인 사안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면에서 상이한 점이 적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정부가 학력을 인정해 주어 의사국가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은 받을 수 있었다. 마흔 다섯 나이에 국가시험을 치러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연세의대 교수님들과 성애병원측의 배려로 뒤늦게 한국에서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처음엔 시험유형이 익숙지 않아 2년 연거푸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의사국가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은 힘겨웠지만 젊은 시절 무턱대고 공부했던 내용들을 차곡차곡 정립하는 시간을 통해 새로운 눈을 뜰 수 있었던 점에 의미를 두고 싶다.

요즘 성애병원에서의 인턴 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강행군의 연속이다. 신경외과, 소아과, 일반외과, 신경과, 응급실 그리고 지금의 내과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1년이 지나갔는지 돌이켜 볼 틈도 없다. 필자는 이번에 전기 전공의 모집에서 성애병원 가정의학과에 합격, 레지던트 1년차로 수련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모두 주변에서 걱정해 주고 격려해 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3년 동안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가 되면 평양과 베이징 그리고 서울에서의 경험을 종합, 양한방 결합을 통한 만성통증 분야에서 기여하고 싶다. 필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 이바지하고, 주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 믿는다.

혈기왕성한 젊은 동료들을 따라 가자니 다소 힘이 부치곤 하지만 정작 힘이 든 것은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심적 부담이다. 많은 것을 배우고 고쳐보려 노력하지만 40년 이상 몸에 배인 습관이 불쑥 튀어나올 때면 아직 멀었다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서 의사로서의 새 출발은 숱한 좌절과 고난을 통해 성취한 것이기에 더욱 값지게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북한의 의사자격을 그대로 인정받았더라고 하더라도 문화적 차이 때문에 남한 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통해 한국에서 의사가 되기까지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고, 격려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충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아직도 인턴과정을 밟는 위치에서 한국의 의료계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한다는 자체가 시기상조가 아닌가 싶다.

끝으로 남북통일을 위한 대의명분하에 한국의 의료계에서 마땅히 통일을 위한 준비를 해야하지 않을까 하여 다음과 같은 개인적인 견해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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