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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19 11:38 (금)
의사로서 제2의 삶 살고 있습니다

의사로서 제2의 삶 살고 있습니다

  • 김은아 기자 eak@kma.org
  • 승인 2004.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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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 나와보세요. 그 때 그 분 또 찾아오셨어요."
간호사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 난다.
"무슨 일이죠?"
"통증이 심해져 진통제 처방 원하는데 형편이 어려우신가봐요."

당뇨성 족부궤양(DM foot)으로 자주 오는 분이다. 다리 통증이 심해서 다시 찾아온 조선족 환자인데, 내분비 관련 임상실험에라도 참여해서 지속적인 관리를 받을 수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채근한다. 이완주 원장(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60)은 근본적인 혈당 조절이 필요하다며 여기저기에 전화를 건다. 이곳 원장님은 치료만 하는 게 아니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다. 서울시내 길가 한복판에 세워진, 선명한 간판이 걸린 건물안으로 발을 들여놨을 때부터였다. 어쩐지 사람들도 낯설고, 곳곳 풍경들도 사뭇 다르다. 이곳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시설(쉼터·교회·병원 등)로만 이뤄진 건물이다.

'최초의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이란 이름만 듣고 작은 클리닉 정도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가보니 내과·정형외과·치과부터 수술·입원·물리치료까지, 언뜻 봐선 준종합병원 수준이다. 생긴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아서인지 깔끔하고 훤한 인테리어에 치료실도 제법 여럿 갖추고 있고, 복도에는 종종 걸음을 치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모습도 보인다.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을 헤치고서야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각종 주사기와 소모품들에 둘러싸여 매우 분주한 모습이다.

"무척 바빠 보이세요."
"오늘은 그나마 시간이 좀 생겨서 물품 정리를 하는 중이에요."
"병원을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열던데, 이유가 있나요?"

"처음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을 해야 하니까 오후 시간에 진료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이 아프면 아예 하루 일을 쉬고 병원에 오더라구요. 앞으로는 전일 진료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력면에서 어려움이 있죠."

"현재 인력 운영은 어떻게 하고 계세요?"
"많은 의사분들이 도와주고 계세요. 자원봉사형식으로 일주일에 몇 일씩 나와서 진료합니다. 간호사나 물리치료사, 방사선사는 고용직입니다. 요즘은 병원이 어려워서 제대로 봉급을 못 주고 있어요.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하는데…"

걱정 섞인 한숨이 푹. 예상대로다. 대부분의 봉사단체가 그렇듯, 재정난이 심각하다. 여기에선 병원비를 의료보험수가의 80%수준 이하로 받는데 진료비·약값·입원비 정도만 거의 헐값에 받는다. 앞으로 자주 이용하는 환자를 대상으로 자체적인 보험을 적용하는 것도 생각 중이란다.

"대부분 내원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불법체류자에요. 쉽게 말해 단속대상이죠. 정부에선 불법이라서 지원해 줄 수 없다는군요. 하지만 많은 민간단체들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왔어요. 병원을 짓기까지 협력병원·교회·건설업체·제약회사 등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설마 여기까지 불법체류자 단속을 나오진 않겠죠?"

"아파서 찾아온 사람을 잡아갈 수는 없죠. 그렇지만 병원까지는 안 오고 이 앞 바로 길 건너에서 체포해 간 적이 있다고 해요."
요즘 들어 부쩍 심해진 단속에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은 일거리도 빼앗기고 마음대로 밖에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래서인지 내원 환자수가 줄고 있다고 한다.

불법체류자들의 처지가 이렇다보니 무료로 진료하는 일도 많다.
"형편이 어려운 외국인을 치료해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병원을 열었습니다. 돈이 많다면 굳이 우리 병원을 찾지 않겠죠. 그동안 몸이 아파도 돈은 없고 환경도 열악하다보니,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먼 타지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많았어요. 이 병원에서만큼은 그런 일이 없어야겠죠. 치료를 다 받고 돈을 내지 못해 그냥 집에 가시는 분들도 종종 있어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어떻게 봉사의 길로 접어들게 되셨나요?"

"어머니도 산부인과 의사셨어요. 평생을 일선진료현장에서 일하셨죠. 오랜시간동안 환자들을 위해서 일해오신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어머니는 60세가 되고 병원을 그만 두셨는데, 의사로서의 삶도 그대로 끝나 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더군요. 그래서 예전부터 60세가 되면, 병원일을 접고 의료봉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사로서 제 2의 삶을 사는 셈이죠."

"봉사를 결심했더라도 병원 일을 맡기까지 쉽진 않았을텐데요."
"그렇죠. 의료선교활동을 하다가 우연히 중국동포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됐고, 병원 설립에 뜻이 있던 김해성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이 일이'내게 주어진 사명'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먹고 살 돈을 내게 주셨으니, 내가 베풀어야 할 때'란 생각이 든 것이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길이 있는 곳에 끝이 있다.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이 병원을 제 궤도에 올려 놓을 때까지 열심히 해 볼 겁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수술실도 활성화시켜야 하고, 전일 진료를 할 수 있도록 운영 시스템도 정비해야 하고, 가능하다면 응급실 운영도 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젊은 의사에게 병원을 맡겨야죠. 몸집이 커진 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제게 역부족일겁니다. 대부분 성인 내과환자인데 소아과 의사로서 한계도 있구요. 저요? 전 저를 필요로 하는 또 다른 곳에 가야죠."

인터뷰 내내 이 원장을 스토커처럼 따라다녔다. 지나치는 환자마다 연신 "원장님, 고맙습니다"라며 옷깃을 잡는다. 옆에 있는 나에게도 사진 예쁘게 찍어달라며 싱글벙글이다. 그는 바빠도 환자들을 그냥 지나치는 법은 없다. 일일이 나아졌는지 물어보고, 신체검진을 해보기도 하고 손을 어루만져주기도 한다.

"원장님, 이 분 에코 봐야할 것 같은데요. 문제가 좀 있어요."
"정밀 검사가 필요하면 더 큰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네요. 제가 다른 병원을 알아볼게요."
자원봉사를 하는 가정의학과 의사가 자문을 얻으려고 심전도 결과지를 들고 온다.

오늘은 환자가 없는 날이라는데 기다리는 환자가 끊이질 않는다. 소외받은 외국인노동자들을 돌보는 막중한 역할을 맡은 분을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의 인터뷰는 필요없을 것 같다. 그는 열마디 말보다 행동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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