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9 21:36 (금)
인술의길메리놀수녀회유류시아
인술의길메리놀수녀회유류시아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4.09.30 00:00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술의 길 사랑의 길_메리놀수녀회 유 루시아 수녀
'글을 쓰고 싶다'는 고등학교 3학년 소녀의 마음을 바꾼 것은 당시 담임선생님의 말 한마디였다. "의대에 진학해서도, 의사가 되어서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글은 쓸 수 있다는 것." 당시 담임선생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의대를 선택했고, 이는 지난 50여년을 의사로서, 수녀로서, 선교사로서 살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의과대학을 다니면서도 공부에만 몰두했고, 1등을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는 유 루시아 수녀가 어려운 사람들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부산의 일신기독병원에서의 인턴 수련 시절, 닥터 헬렌 맥킨지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유 루시아 수녀는 닥터 헬렌 맥킨지를 주저 없이 '인생의 나침판'이라 말하며, 호주 선교사의 딸로서 부산에 일신기독병원을 차려 당시 힘들었던 한국 여성들을 돌봐줬던 장본인이라고 소개했다. "6.25 당시 우리나라가 굉장히 어렵고 힘들었지. 한국 여성들을 정성껏 돌보는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막연히 선교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일신기독병원에서 1년 반 동안 지내면서 이런 다짐은 더욱 확고해졌다. 유 루시아 수녀는 그 후 산부인과 레지던트 수련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지금 생각하면 이 사람, 저 사람, 이 모퉁이, 저 모퉁이로 당신을 이끈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겠냐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미국에 있을 당시 메리놀수녀회의 머시 수녀님한테 편지가 왔어. 케냐 정부하고 독일주교회에서 돈을 모아서 케냐에 병원을 짓는데 의사 한 명, 간호사 세 명이 필요하다고. 갈 마음이 있냐고. 머시 수녀님도 우리나라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었거든. 암암리에 내가 받은 은혜는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지." 이런 생각에 머시수녀의 제의에 선뜻 '네, 가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했지만 20대의 젊은 여자로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두려웠지. 케냐로 떠나기 일주일 전에는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거든. 그게 보통일인가?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되어야 해."라고 단호히 말하는 70대 노파의 눈에서 처음 케냐를 떠나는 20대의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떠난 길은 20년간 계속됐고, 현재 '케냐의 어머니'는 그이의 대표적인 수식어가 되었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 그곳의 생활은 생각보다 더 참담했다. "처음 갔을 때 문화차이도 나고, 모르는 것도 있고, 많이 배웠지. 대부분이 영양실조, 폐병, 설사병, 나병 등 이른바 후진국 병이었어. 6.25를 지낸 사람들은 내 말을 알거야. 또한 소아의 사망률이 50%거든. 즉 금년에 100명을 낳으면 5년 후엔 50명만 살아있는 거지." 상황이 이렇다보니 하루 300명의 환자들을 돌봐야 했고, 수술이 있는 화?목요일에는 하루 종일 수술 방에 있었던 적도 있었다. 전기도 없고, 물도 없고, 먹을거리도 넉넉지 않은 그곳에서 유 루시아 수녀는 20년을 한국 의사로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사막이나 케냐의 오지만을 돌며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료했다. 그곳에서 가장 힘든 점은 정서적인 차이였단다. "케냐 사람들은 정신불구자들을 하늘에서 벌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치료를 못 받게 하거든. 그 마을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가장 힘들었지. 내 말은 듣지도 않아. 그래서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설득하도록 했지. 마을 공동체 사람들 중에 몇 명을 뽑아 트레이닝을 시켜 가정방문을 시키고 마을에 쉼터도 마련해 사람들을 오게 만들었지. 경제적으로 허락된다면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어. 아이들이 얼마나 컸는지…. 트레이닝 시킨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궁금하거든." 이 짧은 글에서 힘들었던 그이의 20년 세월을 일일이 열거할 생각은 없다. 그이 또한 지금 생각하면 미소를 지을 만큼 그들의 생활이 궁금하고, 죽기 전에 한 번 가보고 싶은 땅이니까.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어찌 보면 케냐는 유 루시아 수녀의 또 하나의 고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렇고, 그곳에 대해 말하는 모습이 그렇다. 갑자기 유 루시아 수녀가 그 곳을 떠난 이유가 궁금해졌다. "1988년,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할 때였지.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에 출전한 케냐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었거든. 가장 큰 이유는 내 뿌리를 찾고 싶어서였고." 11세 때부터 공부를 위해 혼자 객지 생활을 했다던 그이는 고등학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