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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20 06:00 (토)
[기획취재]의료영역이 무너진다

[기획취재]의료영역이 무너진다

  • 이정환 기자 leejh91@kma.org
  • 승인 2004.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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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땅 잃는 의사들-조제위임제도의 빛과 그늘(2)

<글 싣는 순서>
1. 오래된 음모 - "약사는 의사다"
2. 의료영역이 무너진다
3. 벼랑 끝에 선 1차의료
4. 누가 합의를 파기했나?
5. 정책실패의 원인과 대안


의사행세 버젓 단속은 나몰라라

의료개혁이라는 허울아래 반강제적으로 시행된 지 4년째를 맞는 조제위임제도가, 우려한 바와 같이 의료의 전문성을 침해한 채 약사에게 의료의 일부를 넘겨주는 형태로 왜곡돼 가고 있다.
이 제도 시행에 앞서, 가장 우려되던 약사의 임의조제 및 대체조제가 갈수록 횡행해 결국 조제권을 박탈당한 의사만이 제도의 희생양이 돼 버린 것이다.
이같은 약사의 불법조제 및 의료의 전문성 침해는 조제위임제도 시행 이후 점차 늘어 3년째인 지난해 극에 달했다.<편집자주>

약국 불법행위 횡행

지난 해 2월초 지방의 한 대학과 신문사가 약국의 임의조제·대체조제에 관한 실태를 조사한 결과 58%에 달하는 약국이 의사의 동의를 생략한 채 임의로 불법 대체조제를 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조제위임제도의 원칙이 무시되고 있는 현실이 본격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우리 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제대 보건행정학과와 부산일보가 부산지역 43개 약국을 대상으로 모의환자를 통해 실시한 이 조사에서 58%에 달하는 25개 약국이 이같은 불법조제 행위를 일삼고 있었으며, 이중 17개 약국은 대체조제 사실을 환자에게 통보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약국의 불법조제가 국민건강에 끼칠 위험의 심각성을 시사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처방전에 기재된 5개 약품중 최대 4개 품목까지 대체조제를 한 약국이 6개에 달하는 등 약품대체 비율이 50%를 넘어섰으며 약사가 아닌 사람이 조제한 경우가 2건, 비약사가 복약지도를 한 약국이 5개에 이르렀다. 특히 임의조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15개 약국에서 위궤양·감기몸살 등의 증세를 호소하고 1일분의 약을 요구한 결과 67%에 달하는 10개 약국에서 낱알판매 및 낱알조제 형태로 약을 판매하는 한편 낱알조제시 항생제를 포함시킨 약국도 20%에 달해 사실상 무면허 의료행위를 하고 있음이 증명됐다. 이는 조제위임제도 시행의 목적과 원칙이 무시되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기도 하다.

이같은 약국의 불법조제(더 구체적으로는 무면허의료) 행위는 지난해 연말 국가 연구기관에 의해 다시 한번 증명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4월부터 조사를 실시해 연말에 보건복지부에 제출한 '의약분업 성과평가와 제도개선' 연구결과가 다시 한번 우리를 아연케 했다.

조재국 박사팀이 의사 258명을 대상으로 조제위임제도 이후 임의조제 인식정도 등을 조사한 결과 의사의 88.9%가 '환자를 통해 임의조제 발생 사례를 확인 또는 인지한 적이 있다'고 응답, 일선 진료 의사들 스스로 의료의 전문성 침해를 체감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와는 별도로 임의조제 근절 여부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96.8%가 '근절되지 않았다'고 응답해 매우 높은 불신감을 드러냈다. 이같은 불신감은 병원보다 의원에서 더 높았다.

한편 환자를 통해 임의조제 발생을 확인 또는 인지한 경우 신고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3%만이 신고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임의조제와 관련, 약사들에 대한 불신감 못지 않게 불법조제를 단속·처벌해야 할 당국에 대한 불신감이 높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의사들이 임의조제 사실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이유의 63.4%가 '신고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불감증 심각

임의조제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보면 이는 더 확실해 진다. '약사의 준법의식 부족'이 79%로 가장 많이 지적돼 약사들에 대한 불신감을 그대로 반영했으며, 67.8%로 뒤를 바짝 이은 것이 '당국의 단속의지 부족'이다. '당국의 단속능력 부족'이 29%에 그친 것을 감안하면, 당국은 단속할 능력은 있으나 단속할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의사들의 눈에는 그렇게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약사들 스스로 느끼는 불법조제 현실은 어떤가.
같은 연구에서 약사 24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2.9%에 달하는 58명이 '매우 흔할 것' 또는 '일부 있을 것'이라고 응답, 일선 약국에서 임의조제가 자행되고 있을 것이라는 현실을 인정했다. 아울러 병·의원 주변 약국보다 동네약국에 더 심할 것이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특히 임의조제가 남아있는 이유에 대해 의사들의 인식과 달리'당국의 단속의지 부족'은 1.5%에 그친 반면 '약사의 준법의식 부족'이 53%로 가장 많이 꼽혀, 약사들 스스로 무면허 의료행위를 통한 돈벌이에 급급해 준법의식을 버리고 있음을 시인했다.

게다가 약사들의 48.1%만이 '반드시 복약지도를 한다'고 밝혀 약화사고 방지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간과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한편 약사들의 불법조제로도 모자라, 속칭 '카운터'라고 불리는 무자격자를 고용해 의약품을 판매한 약국도 무더기로 적발돼 약사들의 준법의식 부족은 물론 도덕성까지 의심케하는 사건이 지난해 12월 발생했다.

대구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이 대구·경북 지역 약국을 대상으로 무자격자 의약품 판매 및 전문의약품 불법판매 행위에 대한 특별점검을 실시한 결과 17개 약국이 약사법을 위반하며 '카운터'를 통해 의약품을 판매한 혐의로 적발돼 행정처분 및 고발 조치했다. 또 의약분업 예외지역의 경우 5일분을 초과한 전문의약품을 판매하거나, 오·남용우려 의약품을 처방전없이 판매한 행위도 적발됐다.

약국에서의 카운터 고용은 공공연한 비밀일 정도로 만연돼 있을 뿐 아니라 최근 수십명의 카운터가 생존권을 주장하며 집단행동을 벌일 정도로, 이미 약국가에서는 당당한 전문직업인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약사회장에 출마한 후보조차 무자격자를 고용했던 경험을 털어놓는 양심선언을 공식석상에서 할 정도인 것이다.

"카운터 고용이 약국운영의 주요수단으로 자리잡은지 오래이며, 전문의약품을 처방전 없이 팔거나 아예 가짜약을 판매할 정도"라는 제약회사 관계자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약국가의 도덕적 불감증은 아주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다.

'국민 조제선택제도' 해법

국가 연구기관의 연구결과와 당국의 적발사실에 아연해 있을 때, 약사들의 무면허 의료행위가 국민건강의 위해에 끼치는 악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새해 벽두 대한내과개원의협의회의 불법약국에 대한 고발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울 은평구 소재 모 약국이 3~4년 전부터 허리·팔·다리 등의 근육통이나 신경통이 있는 환자들에게 비방의 조제약을 처방전없이 투약, 굉장한 효과가 나타나 전국에서 많은 환자들이 이 약을 구입·복용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내과개원의협의회는 1월 4일 이 약국을 의료법 위반 및 약사법 위반 혐의로, 녹화테이프·약물 등 증거물과 함께 서울지검 동부지청에 고발장을 접수했다.

이 약국은 특히 단골환자에게만 조제·투약하고 있었으며, 단골환자 장부에 올라가 있는 숫자가 60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문제는 이 약을 복용하면 마약과 같이, 부위에 관계없이 통증이 없어지는 등 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큰 문제는 이 약을 1년이상 복용하고 있는 환자의 상당수에서 당뇨병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경악스런 실태에 직면한 내과개원의협의회는 단골환자의 이름을 알아내 문제의 약물과 당뇨병 발생과의 연관관계를 확인했다. 문제의 약물을 구입해 분석한 결과 스테로이드 호르몬이 다량 함유돼 있음을 밝혀냈다.

스테로이드 호르몬은 당뇨병을 비롯 비만·고혈압·신부전증·폐결핵 등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한 합병증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의사의 처방전에 의해서만 사용돼야 하는 약물이다. 이 호르몬은 순간적인 진통효과와 전신의 상쾌함으로 인해 많은 약사들이 불법을 자행하는데 사용해 왔다. 아프고 선량한 국민에게, 금품갈취를 위해 스테로이드 호르몬을 먹고 당뇨병을 유발시킨 행위에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을 뿐이다.

이 약국의 불법조제 사례는 내과개원의협의회의 철저한 조사와 증거수집에 이은 고발에 따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지만, 많은 약국의 불법 행위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채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31일 '약 바꿔치기조제 및 임의조제에 대한 실상과 대책 마련'을 주제로 열린 제3차 전국의사 반모임에 참석한 회원들의 경험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태반추출물 성분의 주사제 '플라센타 제제'를 의사의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구입한 후 주사를 놓아달라고 내원한 적이 있다", "의료기관이 문을 닫은 저녁시간 이후 약사의 교대시간에 가족에 의한 불법 조제·판매 행위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등등.

그렇다면 무엇이, 이같은 약사들의 불법조제 행위로 부터 의료의 전문성을 되찾아 의권을 회복하고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 될 것인가.
1월 31일 대한의사협회 임시대의원총회의 결의대로 현행 조제위임제도를 철폐하고, 국민에게 조제의 선택권을 부여하는 '국민 조제선택제도'가 현실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모델일 수밖에 없다.

이제 의약분업과 관련해 우리가 가야할 길이 분명히 정해진 만큼 회원 모두가 국민의 지지와 성원을 이끌어내고, 하나로 뭉쳐 흔들림 없이 갈 길을 가야 한다.

<기획취재 2팀>
편만섭기자 pyunms@kma.org
조명덕기자 mdcho@kma.org
송성철기자 songster@kma.org
이석영기자 dekard@km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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