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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윤탁 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원의 남극 이야기
노윤탁 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원의 남극 이야기
  • 강지형 의협신문 명예기자(서울의대 본과3학년) kangjh0543@naver.com
  • 승인 2022.11.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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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 꺼지지 않는 작은 불꽃, 진짜 소망에 귀 기울여 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넓고 추운 사막, 펭귄의 고향이자 그 어떤 나라도 지배하지 못하는 무주의 대륙, 남극. 일반인은 함부로 발을 내디딜 수도 없는 이 땅에 지어진 기지에 머물며 연구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세종과학기지의 월동연구대이다. 각 분야의 연구자와 기술자들이 모인 이 드림팀에서 이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는 빼려야 뺄 수 없는 필수인력이다. 남극에서 '의사'이자 '월동대원'으로서의 삶은 어떠한지, [의협신문]은 제35차 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원(2021.12.03.~2022.12.31.)으로 파견돼 활동중인 노윤탁 대원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의협신문
노윤탁 남극 대원 ⓒ의협신문

50세 미만 파견 의사 희귀한 현실...남극에 가기 위해 의사가 된 걸까? 

1년 간 남극에서 의사로 근무한다는 것은, 그 시간 동안 쌓을 수 있는 경력과 진료 경험, 그리고 한국의 친숙한 근무환경과 생활환경을 모조리 포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월동대 의사 지원자의 거의 대부분이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결단이 결코 쉽지 않은 선택임을 방증한다. 노윤탁 대원 역시 “1년간의 남극 생활은 의사에게 결코 이득이 아니다”라며 “한창 자기 영역과 가정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을 시기에 남극으로 떠나는 것은 단순히 어려운 수준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중차대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노 대원이 그렇게 희귀하다는 ‘젊은 남극 파견 의사’를 자처한 이유는 무엇일까(참고로 노 대원은 1982년생이다). 남극 지원 동기를 묻는 질문에, 그는 “어떤 대의가 있어 온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작은 소망이었을 뿐”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어떤 거창한 포부도, 이루고자 하는 숭고한 사명도 없었다. 어릴 적 막연히 생각했지만 현실에 밀려 미뤄두었던, 세종 과학기지에 가보고 싶다는 꿈. 건축설계, 요트운영, 창업 등 수많은 모험과 도전을 거듭하던 그의 마음속에 어느 날 되살아난 그 꿈이, 그로 하여금 의대를 졸업하고 남극으로 향하는 새로운 도전을 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어떻게 말하면 그는 단순히 의사로서 남극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남극에 가기 위해 의사가 된 셈이다.

남극 파견 의사가 되기까지의 과정..."본인의 결심과 가족의 응원이 절대적"

세종과학기지 파견 의사로 지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래 세종과학기지에는 공중보건의사(공보의)가 1년 단위로 파견됐으나, 공보의 숫자의 지속적 감소로 2015년에 이 제도는 폐지됐고, 2016년부터는 가천대학교 길병원에서 파견 의사의 선발·채용 및 필요 시 협진과 자문을 담당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노 대원은 “길병원 직원을 우대하는 것은 아니고, 의사면허를 가진 사람이라면 전공에 관계없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며 “결국 가장 필요한 것은 본인의 결심과 가족의 응원”이라고 설명했다.

노 대원의 경우 어디로 연락해야 할지를 몰라, 길병원 홍보팀에 전화를 걸어 지원 방법을 물었다. 그는 “인사팀에서 4월 즈음 정식 공고가 날 것이라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줬고, 실제로 길병원과 극지연구소 채용안내 홈페이지 양쪽에 공고가 올라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후 서류평가 및 면접을 본 그는 작년 6월 말 최종합격 통보를 받았다.

남극의 과학기지가 세종과학기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988년 지어진 세종과학기지는 가장 가까운 남극대륙으로부터 200km 정도 떨어진 킹 조지 섬의 바톤 반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실제로 남극대륙 본토에 위치하고 있는 기지는 그와 정반대편인 테라노바 만 연안에 2014년 지어진 장보고과학기지이다. 남극 본토에 위치한 만큼 외부와의 교류가 극도로 어려운 탓에, 장보고과학기지의 의사는 거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 때문에 세종과학기지와 달리 장보고과학기지에 지원하려면 외과계 전문의 자격증이 있어야 하며, 기지 내에는 전신마취를 포함한 응급수술을 진행할 수 있는 장비와 시설까지 마련돼 있다. 지원시 유의사항이 있나는 질문에 노 대원은 “장보고과학기지와 세종과학기지 모두 9~10월에 파견 기간이 시작되므로 수련 중인 인턴이나 전공의는 상당한 부담을 안고 결정해야 하며, 봉직의 역시 길병원과 정식 고용계약을 체결해야 하므로 원래 일하던 병원과 상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답했다.

ⓒ의협신문
일년에 며칠 없는 맑은 밤하늘, 칠석날의 오작교가 세종기지 뒤편에 나타났다. 남극에선 우리은하(은하수)뿐만 아니라, 마젤란 은하도 맨눈으로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의협신문

기지 인력 대부분 외부와 단절된 채 9개월여 함께 월동...의료문제는 천차만별

세종과학기지에는 어떤 사람들이 함께할까. 여름에 기지의 유지보수를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과 같이 일시적으로 기지에 머무르는 사람들도 있으나,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하는 것은 외부와 단절된 채 약 9개월(3~11월)의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월동대원들이다. 배관수리기술자, 용접기술자, 생물학 연구자, 대기과학 연구자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남극 연구’라는 하나의 목적 아래 한데 모여 겨울을 난다. 이 월동대 속에서 노 대원은 대원들의 전문성에 자신을 의탁하는 한 명의 월동대원이자, 자신의 전문성으로 대원들을 돌보는 유일한 의사였다.

의사로서 월동대 안에서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 노 대원은 “월동대원이 피가 날 때 멈추게 해줄 사람도, 날카로운 돌밭을 걷다 찢어졌을 때 최대한 흉이 지지 않게 치료해줄 사람도, 만에 하나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사람이 있을 때 생명의 시간을 연장해줄 사람도 바로 의사”라고 설명했다.

당신의 가슴 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작은 불꽃이 있는지, 현실과 타협하면서 잠시 잊고 지냈던 당신의 진짜 소망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그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실제로 남극에서 발생하는 의료문제는 그 종류와 심각도가 천차만별이다. 복잡한 기계시설을 다루다 다치는 사람이 생기면 노 대원이 직접 간단한 이학적 검진과 영상의학적 검사를 실시하고, 봉합이나 약 처방까지 할 수 있었다. 판단이 명확히 서지 않을 때는 극지연구소와 협약을 맺고 있는 가천대 길병원의 응급의학과 핫라인을 활용할 수도 있다. 그는 “약간의 절차를 거치면 심전도, 엑스선사진, 초음파 소견도 물어볼 수 있다”며 세종과학기지와 길병원 사이에서 전문의 자문이 이뤄지는 과정을 소개했다. 개인적 인맥을 동원해 한국의 친구들과 동료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 역시 방법이다.

남극에 파견된 의사는 한 명이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환자가 위독할 경우에는 수십억원에 달하는 예비비를 투입해 비상 항공기 및 인력을 파견해 환자를 칠레로 후송하기도 한다. 노 대원은 후송 과정에 있어 “날씨가 가장 큰 변수”라며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 때문에 칠레를 출발해 근처까지 왔던 항공기가 안개가 있어 착륙하지 못하고 돌아간 적도 있다”라고 말했다.

ⓒ의협신문
높이만 40~50m에 달하는 거대한 빙벽은 수백만 년간 쌓인 눈의 나이테다. 평소에는 바다에 바로 접해있어 접근이 불가능한 곳으로, 한겨울에만 사람의 접근이 허용된다. ⓒ의협신문

대원들의 정신적 고통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남극의 월동대에 지원할 정도의 도전정신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만 모였다 해도, 해가 10시에 뜨고 14시에 지는 남극의 겨울 속에서 고립된 채 오랜 시간 지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다. 노 대원은 이런 상황 속에서는 작은 마찰도 큰 불화로 번질 수 있다며 “이런 징후를 의사가 빨리 알아채기 위해서는 대원들이 의사를 믿어줘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의사는 언제나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그렇게 털어놓은 말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새 나가지 않는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 역시 의사의 몫이라는 말이다. 노 대원의 경우 대원들을 대상으로 매월 진행하는 신체검진 외에도 격월로 30분 이상의 심층상담을 진행했다. 그는 “다들 처음에는 형식적인 대담이라 생각했지만, 점점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라며, 이런 대원들의 아픈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고 효과적으로 상담해줄 수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오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남극만큼 주치의가 환자들과 가까이 오랜 시간 지낼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세종과학기지 내에서 진료실과 진료시간의 시공간적 구분은 무의미했다. 노 대원은 “점심식사를 하던 중이라도, 밤에 함께 모여 영화를 보던 중이라도 의학적 의문이 생기면 즉시 해결해줄 수 있었다”며,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UptoDate를 개인적으로 구독해 환자교육 파트를 매일같이 보며 흥미롭거나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을 찾아 대원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월요일 아침 회의에서 중요한 의학지식을 간단히 요약해 정리해주기도 하고,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NEJM)이나 영국의학저널(BMJ)에 발표된 논문의 핵심 내용을 리뷰해주기도 했다. 그는 “세종과학기지 월동대원의 약 절반이 연구원”이라며, 대원들의 지식 추구를 향한 욕구가 상당했음을 설명했다.

남극에 파견된 타국의 의사와의 교류 역시 이뤄진다. COVID-19로 인해 기지 간 교류가 금지되며 의료 교류활동도 중단됐으나, 이전에는 응급환자가 발생해 손이 필요할 때면 여러 나라의 의사들이 해당 기지로 이동해 함께 진료나 수술을 진행한 적도 있었다. 노 대원은 “코로나19 이후로는 메신저를 통한 협진이 주로 이뤄졌다”며 “서서히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모두가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현재 남극에 파견된 전 세계 의사들의 메신저 방이 존재하나, 의사들의 메신저라 해도 펭귄과 물개, 오로라 사진만이 가득하다”며 자신 역시 거기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월동대원으로서의 소임 역시 방기할 수 없는 임무였다. 중장비가 닿지 않는 곳에 밤새 쌓인 눈을 치우기 위해 아침에 다 같이 제설작업을 나가기도 하고, 창고 정리 및 비상대피소 수리를 위해 다함께 힘을 합치기도 한다. 때로는 의사로서, 때로는 월동대원으로서 본인의 역할을 수행해내야 한다는 사실, 그것이 세종과학기지에 파견된 의사의 의무이자 매력이란다.

ⓒ의협신문
빙벽이 조금씩 무너지며, 이따금 모여있던 유빙들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바다 밖으로 몰려 나오기도 한다. 흘러오던 유빙들이 섬에 걸려 나뉘며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의협신문

"남극의 매력이요?"..."바다 표범, 물개, 펭귄, 우주가 쏟아져 내릴 듯한 은하수와 별 등등..."

남극의 매력에 대해 묻자 노 대원은 수많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감각적인 표현들을 활용해 남극의 경관을 묘사해 나갔다. 겁쟁이 펭귄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이 바쁘게 일하는 대원들을 향한다. 바다표범과 물개들이 눈밭에 올라와 잠자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빙수 위의 빙수 떡을 연상케 한다. 귀엽고 느린 꼬마아이처럼 뒤뚱거리며 뭍을 돌아다니던 펭귄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전속력으로 달리는 고무보트와 나란히 헤엄치는 날쌘 돌이가 된다. 날개를 펼치면 2미터는 족히 될 듯한 새들이 바다 위를 스칠 듯 날아간다. 날씨가 좋은 날 밤 우주가 쏟아져 내릴 듯 한 은하수와 별들이 하늘을 수놓는다. 노 대원이 남극의 매력에 얼마나 심취해 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인터뷰가 이뤄진 10월, 노 대원은 월동대 활동 기간의 마무리를 앞두고(노 대원의 근무 기간은 올 12월말 종료된다)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다음 사람에게 넘겨줄 준비를 하고 있다. 파견기간동안 아쉬운 점이 있었는지 묻자, 그는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머신과 천체사진 촬영 장비를 준비하지 못했던 점이 못내 아쉽다며 남극에 파견을 올 생각이 있다면 이 리스트를 꼭 추천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일단 남극에 들어온 뒤에는 새로운 물건을 전혀 구할 수 없기에, 대원들의 생일이나 다른 기지와 교류할 때 줄 소소한 선물들을 챙겨오라는 말 역시 먼저 남극에 파견됐던 의사만이 전할 수 있는 소중한 팁이었다.

마지막으로 남극에 파견을 오고자 하는 의사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는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으로 인터뷰의 마무리를 갈음한다.

“당신의 가슴 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작은 불꽃이 있는지, 현실과 타협하면서 잠시 잊고 지냈던 당신의 진짜 소망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그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본 인터뷰는 남극 사정상 서면으로 진행됐으며, 더 많은 남극 정보와 사진은 https://iiuuii.blogspot.com/p/md-in-antarctica.html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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