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
나, 시동을 켤 때
생의 안전띠는 매지 않았네
자궁 속 경로를 탐색하려고
팔찌를 채우고 족문을 찍었지만
그저 울음을 터뜨렸을 뿐이네
탯줄을 자르면서 협박해도
이미 타고난 죄를 발설할 수 없어
엉덩이의 푸른 비밀 간직하며 살기로 했네
나, 그 비밀 풀기 위해
구구단을 외고 맞춤법을 익히고
열심히 삶을 인수분해 했지만
신호등 같은 생의 비밀은 풀리지 않았네
아무렇게 벗어놓아도 움이 트는
유월의 숲길을 통과했고
부드러운 흙이 없어
오래도록 아카시 가시를 만지작거렸을 뿐이네
나, 이제 비밀 간직한 채
왔던 길로 돌아가려 하네
내비게이션은 자꾸만 경로를 이탈하고
과속방지턱 같은 오십견은
모든 도로를 우회하라 하네
손발 묶고도 모자라
너와 나 사이 비밀 새나가지 못하도록
흉물스런 육신에 안전띠를 채울 뿐이네
▶경기도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2004년 <문학과 경계> 등단/시집 <극락강역>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 산문집 <닥터 K를 위한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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