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 가치' 추구하며 사는 삶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계관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년)의 시 중에 <참나무, The Oak> 라는 시가 있다. 자신의 집 앞마당에 있는 수백 년 된 참나무의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 모습을 그린 이 시는 인간의 한 생애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는 면에서 유명하다. 사람들은 특히 겨울철 참나무의 모습을 그린 이 시의 마지막 단락을 좋아한다.
"All his leaves/Fall'n at length,/Look, he stands,/Trunk and bough/Naked strength. 마침내 나뭇잎/모두 떨어지면/보라, 줄기와 가지로/나목 되어 선/저 벌거벗은 '힘'을."
봄에 연두색 작은 새싹들로 단장했던 참나무는, 여름 그 무성한 녹음으로 위용을 자랑하다가 가을이 되면 아름다운 단풍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준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모든 잎이 다 떨어지고 참나무는 앙상한 나무 몸통과 가지들만 남는다. 바로 이때, 시인은 그 벌거벗은 나무에서 놀라운 '힘'을 느낀다.
그렇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활기찬 젊음과 중년, 장년을 지나 언젠가는 늙은 몸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 노후를 맞았을 때, 저 참나무에서처럼 당당한 모습이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시의 메시지다.
요즘, 102세의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책이나 인터뷰 내용 글들이 화제다. 100세를 살아보니 결국 사람은 돈이나 명예와 같은 '외적 가치'보다 성실함과 이타심 같은 '내적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를 맞는 비결이더라는 것이다. 사실 그의 저런 말은 지금까지 우리가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서 수없이 들어왔거나 책에서 읽었던 내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그의 말에 공감하며 감동하는 것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그가 지금 자신의 삶에 대해 진정으로 만족하고 감사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저런 삶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진다. 그것은 일반인들의 경우 매일 매일을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도 편안한 일상적 삶을 살기가 쉽지 않고, 그런 삶 속에서 이타심을 발휘해가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형석 교수는 의식주가 해결되는 수준의 삶에 만족하는 것도, 남을 배려하며 돕는 일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게 결심하고 실천하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다행히도 의사는 누구보다 행복한 노후를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의사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아픈 몸을 이끌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서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체 믿기 어려운 사실은, 우리나라 의사들의 직업 만족도가 매우 낮을 뿐 아니라 건강 상태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 직업별 생명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남자 의사들의 평균수명이 일반인보다 대체로 5년 내외 더 짧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최근 한 대학병원 검진센터 자료에 의하면 의사들의 암 발생 위험이나 비만 위험도 또한 일반인보다 큰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이런 결과는, 평소 의사들의 운동량이 부족하고 식생활도 불규칙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환자 진료와 관련하여 많은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오죽하면 "의사가 하라는 대로는 하지만 의사가 하는 대로는 따라 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겠는가!
의사는 나이가 들어서도 진료 활동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건강에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의사들에게 있어서 환자를 진료하는 일 말고는 달리 자신의 건강이나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한다는 뜻도 된다.
의사들의 경우, 젊어서부터 짬짬이 시간을 내어 적성에 맞는 운동이나 취미 활동을 열심히 하고, 나이 든 이후에도 이를 계속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서구 선진국들의 경우, 이미 오래전부터 의사단체에서 여러 가지 유익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소위 '시니어 의사'들의 노후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정기적으로 이들에게 유익한 강좌를 마련한다든지, 국내외 문화유적지를 단체로 여행한다든지, 여러 형태의 사회봉사 활동 등을 함께 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다소 늦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2011년 3월에 대한의사협회 산하에 <의사 시니어 클럽>을 출범시킨 바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 활동이 미미하고 그나마 수도권에 한정되어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장차 전국 시도 의사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전국적인 활동으로 확대되기를 기대해 본다.
젊어서는 의사로서의 직업적 삶을 '즐기고', 나이가 들어서는 동료 의사들과의 모임을 통해, 자기 계발과 여가 선용, 그리고 사회봉사 활동 등에 참여하며 사는 일이야말로, 나이 든 의사들에게서 테니슨이 말한 겨울철 참나무의 저 '벌거벗은 힘'을 느끼게 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 칼럼이나 기고 내용은 <의협신문>의 편집 방침과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