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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9 12:28 (금)
맹광호 명예교수의 의사의 길-(8) 의사와 인문학
맹광호 명예교수의 의사의 길-(8) 의사와 인문학
  • 맹광호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예방의학)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1.03.28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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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강의·수필 공모전 '의료 인문학' 장려"

"너는 무슨 과(科) 의사 할 거야?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병을 넘는 의사. 질병을 넘어서서 정복하는 의사, 그리고 그 질병 너머 '생명'을 볼 수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 그날을 잊지 않을 거야".
 
이 글은 2020년 '한국의사수필가협회'가 시행한 제10회 '의학도 수필공모전'에서 은상(銀賞)에 입상한 의과대학 본과 2학년 학생의 수필 <병 너머, 병을 넘어> 의 마지막 부분 문장이다.

이 문장 앞부분의 글을 좀 더 살펴보자. 

"해부학 실습 내내, 시신은 보존을 위해 해부하는 부위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부위는 약품을 적신 수건으로 덮어놓는다. 그 탓에 커대버(시신)는 늘 내 눈에는 '다리', '복부', '흉부'로만 존재했다. 그런데 오늘 나는 처음으로, 전체 커대버를 보았다. 아니, 94세의 남성을 보았다. (중략) 커대버에서 처음으로 '삶'을 느꼈다. '질병'이 아닌 '사람'을 보았다. (중략) 아직 임상 의사가 되어 환자를 직접 보기 전에 깨달아서 참 다행이다. 훗날 내가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에게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이 충격을 나는 그대로 오롯이 간직하고 싶다".

캐나다의 내과 전문의이며 유명한 칼럼니스트인 게이버 메이트(Gabor Mate, 1944∼)는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던 그의 2010년 산문집 <몸이 아니라고 말할 때, When the Body Says No>에서 "신체 부위나 기관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그 부위와 기관들이 존재하는 바탕인 인간에 대해 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앞에 소개한 학생의 글과 같은 맥락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의사들이 환자를 질병이 아닌 사람으로 보게 하려는 노력이 지금 전 세계 의학교육의 대세다. 이 일을 위해 대학마다 의료윤리학이나 의학과 문학, 그리고 의(醫) 철학 등 소위 학제적(interdisciplinary) 학문 형태인 '의료인문학(Medical Humanities)' 교육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물론, 의과대학 교육과정 중에 몇 시간 인문학 관련 강의를 들었다고 해서 의사의 과학주의적 진료행태가 바뀔 것이냐는 회의론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학의 대상이 사람인 이상, 인간의 가치 탐구와 표현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에 대한 의과대학들의 관심과 노력은 결코 과소평가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희망도 보인다.

미국 뉴욕타임스 온라인판 '오피니언' 난에는 매주 미국의 주요 사회문제에 대한 저명인사의 진단과 해법을 제시하는 칼럼이 한 편씩 실린다. 신문의 위상에 걸맞게 여기 실리는 칼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매우 크다.

2019년 가을, 한국에도 와서 강연을 한 바 있는 세계적인 저널리스트이며 베스트셀러 작가인 데이비드 본스타인(David Bornstein, 1974∼)이 얼마 전 <의학의 의미 찾기, Medicine's Search for Meaning>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이 신문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는 "지금 미국의 의료가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말로 그의 칼럼을 시작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의료비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여러 가지 건강지표가 상대적으로 낮다든지, 의료보험이 없는 미국인이 수천만 명에 이르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은 의사-환자 사이의 '신뢰 악화'라는 것이다. 그동안 의사-환자 사이에 의료분쟁이 계속 늘어 왔고, 이로 인해 의사들의 방어적(defensive) 진료가 많이 증가해 온 점이 그 증거라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최근 의사-환자 관계 악화로 나타나는 이런 의료위기 상태가 의외로 멀지 않아 극복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얘기하면서, 지금 미국의 대부분 의과대학에서 의료인문학 교육을 강화하고 있는 점을 예로 들고 있다. 특히 그는 작가답게 독서와 글쓰기를 이용한 인문학 교육의 효용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독서와 글쓰기가 의사 누구나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덕목은 아니다. 그러나 의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의료라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기술인 점을 생각할 때, 의학이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존재가치를 높이려는 문학의 도움을 받는 것은 매우 절절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국내 여러 의과대학이 '문학과 의학', '의학과 글쓰기' 등에 관한 과목 등을 개설, 운영하는 것은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다. 

더욱 고무적인 일은, 이미 시인이나 수필가로 정식 문단에 등단한 의사들이 모임을 만들어 문학과 의학의 접점 확대를 위한 노력에 앞장서고 있는 점이다.

2008년에 창립한 '한국의사수필가협회'와 2012년에 역시 시인으로 등단한 의사들이 모여 만든 '한국의사시인회'가 그것이다. 이 두 의사 문인 동인은 정기적인 학술모임과 동인지를 발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의과대학생들을 위한 문학 행사도 마련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한국의사수필가협회'의 '의학도 수필공모전'도 바로 의대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높이고 각 의과대학에서의 의료인문학 교육을 장려하는 취지에서 마련하고 있는 행사다. 

■ 칼럼이나 기고 내용은 <의협신문>의 편집 방침과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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