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9 12:28 (금)
이무상 명예교수 '의대 신·증설' 저지 옛 이야기(상)
이무상 명예교수 '의대 신·증설' 저지 옛 이야기(상)
  • 이무상 연세의대 명예교수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0.09.07 19:06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무상 연세의대 명예교수(전 가천대 석좌교수·전 의학교육평가원장)

이무상 연세의대 명예교수는 1970년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1979년 연세대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비뇨기과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1977년 전문의 자격을 받았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비뇨기과장과 연세의대 비뇨기과학교실 주임교수를 지냈으며, 연세의대 의학교육학과장을 맡기도 했다.
의협 학술이사·(재)한국의학원 이사·대한의학회 수련이사·부회장·감사를 거쳐 한국의학교육평가원장(2007∼2010년) 등을 맡아 의학교육과 의대 인정평가의 틀을 구축하는 데 앞장섰다. 역대 정부의 의대 신증설 정책을 둘러싼 뒷 이야기를 3회에 걸쳐 게재한다.

촛불정부가 제시한 의대 입학정원 증원 년 400명의 이론적 근거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이 숫자는 그냥 나온 것 같지는 않다. L 교수(서울시립대학교)의 자문을 받아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한겨레(9월 3일자) 기사에 대해 정확한 옛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의대 신·증설
1994년까지 의과대학 입학정원은 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결과에 따라 1990년 10월 16일 인가한 대구가톨릭의대(정원 20명)를 끝으로 5년간 동결된 상태였다.

1993년 2월말 출범한 문민정부는 그해 말 의과대학 입학정원을 증원(2,880명에서 3,815명으로)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불과 3년(1994~1996년) 동안 9개교(50명 정원 4개교, 40명 정원 5개교, 총 400명)에 '의예과(의학과) 신설'을 인가했다(표)

문민정부 의대 신설 현황. ⓒ의협신문
문민정부 의대 신설 현황. ⓒ의협신문

의사는 공공재? 
최근 어느 관료가 '의사는 공공재'라고 했다. 아예 재화 취급을 하며, 은연중에 "한국의 의료는 이미 완전한 공공의료"라는 것을 고백했다. 맞는 말이다. 한국 의료는 공공보험에 강제로 묶였으니 기본적으로 강제된 공공의료이다. 공공재라면 마땅히 양성교육 비용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공공의료가 강한 OECD 국가들은 의사양성 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 미국은 의사양성의 기초비용은 개인 부담이라서, 2019년 의대 졸업생 빚이 1인당 평균 2만1,490$이다. 이 빚을 10년 동안에 년 6.5%의 이율로 매월(약 2,300$) 갚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 미국도 전공의 양성비용은 국가가 전담한다. 

그러나 한국의 의사들은 순수한 개인비용(부모의 돈)으로 10여년간 교육 받는다. 

의사를 개인비용으로 양성했다 하더라도 의료는 국민의 기본권이고, 국가가 진료라는 독점권을 주었으니 의사는 공공재라고 주장한다면, 국가가 권력이라는 수단을 이용하여 개인에게서 양성교육 비용을 수탈한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이런 수탈만 없다면 정부 권력은 지금보다도 더 큰 소리를 쳐도 된다. 

교육부는 단과대학 신설을 심의 인가하지는 않는다. 대학교의 단과대학 구성은 대학의 자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예과·의학과 신설도 법률적 표현과 형식은 단순한 학과 신설이지만, 곧 의과대학 신설을 뜻한다. 

교육부에 대한 각 학교의 '학과 신설' 신청 마감은 6월말이다. 교육부는 국립인 경우에는 예산마련도 해야 하므로, 인가여부를 대개는 10월 중에 통보한다. 그러면 각 학교는 신설학과의 개설을 준비하고 몇 달 뒤 다음해 1월에 학생을 모집하여 3월에 개강한다. 즉 모든 준비를 미리 완벽히 해야 한다. 

의예과뿐 아니라 모든 학과가 같은 일정이었다. 그런데 교육부는 1996년 10월 25일 2개 의대를 신설하고, 또 기존의 2개 의대의 입학정원을 증원(단국의대·아주의대 30명 정원을 40명으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상한 것은 A대학 의예과는 조건부 인가(예비 인가)라는 것이다. 사상 초유의 발표였다. 즉, A대학은 1년간 준비해 1998년 3월에 개교토록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의예과 신설을 준비하고 있는 여러 대학과 큰 병원들은 매년 정부의 인가를 기대하면서 신청을 하고 있다. 그러니 예비인가를 특혜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잖아도 계속되는 무더기 의대 신설에 불만이 높은 의료계는 청와대·국회·교육부 그리고  감사원 등 관계 요로에 부당함을 탄원했다. 당시 대통령 주치의는 장관급인데 퇴임 후 A대학의 총장이 됐다. 또 당시 의협 회장은 모 의대 동창회 임원이었으며, 동창회장이  A대학 법인 설립자였다. 당시 의협 회장은 의료계 수장으로서 극히 난처한 입장이었지만 1997년 초부터는 본격적으로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1997년에는 IMF 외환위기와 대통령 선거가 있어 '의대 신·증설' 인가는 없었다. 문민정부 당시 의대 신·증설 문제로 너무 힘이 든 교육부는 새 정부가 들어선 1998년 국내 최초의 의학교육 석사학위 취득자인 김일순 연세의대 교수에게 '의대 설립 준칙'에 관한 연구를 맡겼다. 설립준칙에 맞으면 누구나 의대를 설립할 수 있고, 기존 의대도 이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뜻이다. 연구 중에 폭넓은 설문조사를 실시하면서 내용이 조금씩 공개되기 시작했다. 필자도 자연스럽게 이 연구의 설문과 자문에 응하게 됐다. 

1996년 10월 10일 이촌동 의협회관 5층에서 열린 '의과대학 신증설 저지 확대회의' 이후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 이날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회의에는 대한의사협회 상임이사진 및 시도의사회장, 의장단, 의정회, 대한병원협회, 한국여자의사회, 한국의학교육협의회 산하 의학교육 관련 단체들이 참석해 의과대학 신증설을 막기 위한 대책을 장시간 논의했다. ⓒ의협신문 DB
1996년 10월 10일 이촌동 의협회관 5층에서 열린 '의과대학 신증설 저지 확대회의' 이후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 이날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회의에는 대한의사협회 상임이사진 및 시도의사회장, 의장단, 의정회, 대한병원협회, 한국여자의사회, 한국의학교육협의회 산하 의학교육 관련 단체들이 참석해 의과대학 신증설을 막기 위한 대책을 장시간 논의했다. ⓒ의협신문 DB

그해 봄 의협 임원회의 후에 회장이 일요일에 일이 있냐고 묻기에 별일 없다고 했더니, 운동을 하자며 안양의 유서 깊은 모 골프장으로 9시까지 오란다. 골프를 잘 못한다며 거절하니 화를 낸다. 다음날 골프장에 도착해보니 모 의대 동창회장이 초청한 '동창회 임원 골프대회'였다. 타교 출신은 기획이사와 필자뿐이었다. 모두 4팀으로, 비용도 상당할 것 같았고, 멤버 모두는 의료계 선배들이었다. 필자가 속한 팀에는 바로 A의대 총장이 계셨다. 평소에 존경하던 총장께서 라운딩을 하며 "의대에 왜 기초의학교실이 8개씩이나 필요한가? 요즘 세상에 왜 기생충학교실이 필요한가? 기초학교실에 왜 최소 3명의 교수가 필요한가?"라며 의대 설립 준칙의 문제점을 계속 지적했다. 공이 제대로 맞을 리가 없었다. 신설 의대 저지와 설립 준칙에서 필자가 못되게 군다고 소문이 난 것 같았다. 필자는 연구위원도 아니지만, 교육부가 원하는 더 이상의 '의대 신·증설'을 막기 위한 장치와 제대로 된 의학교육을 위한 최소 기준을 만들고 있다는 말은 들었다고 했다. 운동이 끝나고 술자리가 늦게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운전 때문에 술을 못하는 필자는 클럽하우스 문 앞에서 선배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다들 떠난 후 가방을 메고, 비가 주룩주룩 오는 주차장까지 걸어가면서 '의대 신·증설 저지란 참 어렵군' 하고 새삼 깨달았다. 

민정부(1993∼1998년)는 물론이고 그 전 정부도 정치적으로 의대 신·증설을 인가했지만, 권력의 핵심들도 속으로는 부담이 있어서 훗날을 위해서 교육부가 각서를 받도록 했다. 아마 지금의 정치인들도 그들이 빠져 나갈 별도의 장치를 분명히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교육부는 보건복지부와 협의하여 지역의료의 편차를 줄이고자 국립 2개교(강원·제주)를 제외한 사립의대 법인이사장으로부터 각서(언제까지 어느 곳에 어떤 규모의 '부속병원'을 확보한다)를 받았다. 그런데 각 대학의 총장과 법인 이사장들은 각서를 쓸 때 '부속병원'에 대한 법률적 지식이 없어서 무심코 '부속병원'을 짓겠다고 했다. 당시에는 '교육협력병원'이란 용어와 개념이 법률에 없었다. 의과대학에는 부속병원이 있어야 한다는 조항만 있었다. 그래서 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 같은 훌륭한 거대병원을 교육협력병원으로 가진 대학들조차 오랫동안 고충을 겪었다. 법적으로 '부속병원'은 사립의대가 속한 학교법인에 같이 있어야 하는데, 각서를 쓸 때 정부나 각 학교법인이나 그 사실을 무심코 지나친 것이다.

필자는 1997년 의협 학술이사를 맡아 연중행사로 청와대를 비롯한 국회와 감사원에 부속병원 확보에 관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예를 들면, A대학은 정부에 제출한 각서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고자질 하는 것이다. 탄원서는 교육부로 이첩되고, 매년 교육부는 감사원의 행정감사를 받았다. 한마디로 교육부를 못살게 구는 것이다. 교육부는 1998년 '신설의대 인가 부대조건 심사위윈회'를 만들어 약 8년 동안 가동했다. 교육부 입장에서도 이 위원회가 가동되는 동안에는 골치 아픈 의과대학 신설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이러한 장점 때문에 꽤 오랫동안 가동한 것이다. 이 위원회는 교육부 차관이 위원장을 맡았고, 고등교육국장·보건복지부 국장·언론계 논설위원·변호사·보건경제학 교수들이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의대 교수는 필자를 포함해  모두 3명이었다. 이 위원회도 '의대 신·증설 저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무상 연세의대 명예교수(전 가천대 석좌교수·전 의학교육평가원장) ⓒ의협신문
이무상 연세의대 명예교수(전 가천대 석좌교수·전 의학교육평가원장) ⓒ의협신문

각 사립의대 법인들은 의대 신설을 인가 받으며 최소 500병상의 '부속병원'을 몇 년도까지 지방 중형 도시에 설립하겠다고 각서를 썼다.

그런데 각서를 쓴 시점에는 없었던 KTX가 곧 개통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니 최소 수 천억 원이 필요한 '부속병원' 신설은 대기업군(현대·삼성) 학교법인들도 매우 버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부속병원 건설은 자연히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1년에 2회 개최하는 회의에서는 각 의대의 각서 내용 진행 상황과 진척되지 못하는 이유를 심사했다. 처음에는 IMF 위기가 핑계였지만, 나중에는 KTX를 인해 환자 의 수요가 없다는 것을 어필했다. 

지금은 폐교된 서남의대는 각서를 외형적으로 매우 잘 이행해 심사안건에는 없었다. 그렇지만 서남의대를 직접 가서 살펴본 필자는 서남의대의 예를 들며 신설의대의 많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 신설의대를 돌아보고 얻은 '강의 시간표' 이야기 해서 비 의료계 위원들도 신설의대 교육의 실상을 알도록 했다. 매번 안건에 올라오는 성균관의대와 울산의대는 칭찬했지만 다른 신설의대는 어쩔 수 없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위원회에서 논의한 이야기는 즉각 서남대 이사장의 귀에 들어갔다. 서남대 스파이가 많았던 것이다. 서남대 이사장은 서남의대가 '의학교육 인정평가'에서 계속 탈락하자, 학장을 시켜 당시 필자가 재직하던 교실에 돈으로 의심되는 뭉치를 던져놓고 도망치듯 사라지기도 했다. 필자는 뭉치를 열지도 않고 배달증명으로 되돌려 보냈다.

각설하고, 필자는 대한비뇨기과학회 수련고시이사 연임 중에 '사고'를 쳐서(필기시험 합격률 16.5%), 그 책임을 지고 1994년 1월말 물러났다. 1994년 3월부터 3년간 대한의학회 교육이사를 맡게 됐는데, 1994년 말부터 무더기로 신설의대가 인가되기 시작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