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8 17:57 (목)
이미 가득찬 잔에 물을 더 부으면 어떻게 될까?
이미 가득찬 잔에 물을 더 부으면 어떻게 될까?
  • 김현지 서울대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내과 진료교수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0.07.27 17:51
  • 댓글 1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형병원 환자쏠림 현상

상급종합병원 등 대형병원으로 환자가 몰리는 쏠림현상은 의료계의 고질적 문제 중 하나다. 현재 의료기관 종별 기능이 명확하게 나뉘지 않고, 병원 간 무차별적인 경쟁이 벌어지면서 원활한 의료공급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감기 환자를 두고 의원과 상급종합병원이 경쟁하는 것이 대한민국의료의 현실이다.   

작년 국정감사를 준비하던 어느 날, 기사 속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대형병원 쏠림현상은 착시다."

정부 측은 대형병원은 이미 포화 상태이기 때문에 환자가 늘어나는데 한계가 있으며, 의료계 의견만큼 심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2018년 상급종합병원의 진료비 지출액은 11% 늘었으며 의원급 의료기관 역시 11% 증가해 증가율로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기사에 동의할 수 없었다. 현장에 있는 동료들은 이미 죽겠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정부 주장대로 대형병원이 이미 포화상태라서 진료건수가 늘어날 수 없다면 분명히 대기기간이 늘어났을 것이다.

원래 맛집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는 법, 지극히 상식적인 추론이다. 옳거니, 그럼 최근 몇 년간 대형병원의 외래 대기일수가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해 보자.

문제는 이 자료가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료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자료 요청을 받는 순간부터 병원 전산 팀이 최소 며칠은 '개고생'을 해야 뽑을 수 있는 자료이며, 자칫하면 병원 별 평가로 이어질 수 있는 자료라 병원은 자료제출을 꺼릴 게 분명했다.

또한 국립대병원에 대한 관리·감독의 권한은 보건복지부가 아닌 교육부에 있다. 이 정도로 구체적이고 민감한 자료는 복지부를 통해 요구하면 제출하지 않을 것이다. 각 국립대병원에 예산이나 인사 등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교육부를 통해서 자료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복지부가 아닌 교육부에 자료제출을 요구했다. 

최종 자료를 제출받는 데는 오롯이 2달이 걸렸다. 워낙 방대하고 까다로운 자료여서 처음 받은 자료에는 오류가 많았고, 병원 별로 대기일수에 대한 해석이 다양해서 수십 번의 피드백을 거쳐서야 완결한 자료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작년 국정감사에서 내가 가장 오랜 시간과 공을 들인 자료였다.

비록 나를 비롯한 각 병원 전산 팀이 '개고생'을 하긴 했지만, 전국 국립대병원의 대기일수를 조사한 자료는 이 자료가 최초였다.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결과는 작년 국정감사에서 지적된 그대로다. 2015년 1분기 대비 2019년 1분기 전국 국립대병원 외래 초진 환자의 대기일수는 충남대병원을 제외한 9개 병원에서 크게 증가했다. 특히 서울대병원의 경우 2015년 1분기 16.0일에서 2019년 1분기 29.0일로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이는 서울대병원에서 처음 진료를 보기 위해서는 최소 29.0일 대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남대병원, 부산대병원, 제주대병원 등도 각각 78.2%, 76.6%, 72.5% 등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같은 기간 내 외래 환자 수는 최대 10%대 이상(강원대학교 16.4%) 증가하지 않았으며 몇몇 병원은 오히려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대형병원의 환자 수가 10% 대 이상 증가하지 않았다는 정부의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대형병원 쏠림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환자 수 외에 대기 시간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을 뿐. 

사실 이 자료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외래 대기일수만 취합하지는 않았다. 입원, 수술, CT/MRI 대기일수도 같이 뽑았다. 이 자료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너무나 민감한 자료라 몇몇 병원에서 자료 제출을 끝내 거부함으로서 자료의 완결성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출한 자료를 살펴보아도 워낙 지역별 편차가 크고, 외래 대기일수에 비해 사회적 파장이 훨씬 크기에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편이 더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런 자료가 취합가능하며, 특정한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분명히 하고 싶다. 

대형병원의 대기일수가 길어지는 것은 부실한 의료전달체계의 부작용 중 하나다. 작년 9월 정부가 의료전달체계 개편안을 발표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대형병원은 이미 포화상태이고, 그러므로 정부 주장처럼 외래 환자 수는 앞으로도 일정 이상 늘어날 수 없겠지만 환자들이 대기하는 시간은 지속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환자의 의료접근성이 떨어져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꼭 필요한 환자가, 꼭 필요할 때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더 과감한 의료전달체계 개선안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미 가득찬 잔에 물을 더 부으면? 넘친다. 

■ 칼럼과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침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