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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9 14:11 (금)
청진기 나 지금 힘든데, 와 줄 수 있니?
청진기 나 지금 힘든데, 와 줄 수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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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6.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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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언휘 원장(대구 수성·박언휘종합내과의원/한국노화방지연구소 이사장)
박언휘 원장(대구 수성·박언휘종합내과의원/한국노화방지연구소 이사장)
박언휘 원장(대구 수성·박언휘종합내과의원/한국노화방지연구소 이사장)

둔탁한 소리는 테이블 위에 있던 커피잔이 엎질러지면서 내 귀와 가슴속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던 소리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술렁이며 지나가고, 목련꽃 향기가 눈과 코를 자극했던 정원의 한구석에서 맞이하는 어느 아름다운 봄날의 휴일아침.

다시는 올 것 같지 않던  따사로움과, 후리지아꽃 향기처럼 신선하고 맑은 공기가 오랜만에 갖는 주말 아침을 장식하고 있었다. 한 달에 겨우 한번 찾아오는 나만의 휴일인 유월의 첫 일요일, 행복한 마음으로 멀리서 지인이 보내온 열대과일과 깊고 큰 머그잔에 가득 찬 모카향을 나는 코로, 가슴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은 운명 같은 큰 몸짓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나의 조금은 외롭고 빈 공간들을 조금씩 조금씩 메워주고 있었다. 라돈이 침대를 오염시키고, 발암 물질의 본성을 들러내어 우리들을 위협할지언정, 오랜만에 심취하는 음악은 나를 무아의 경지로 몰입하게 만들면서 황홀경에 빠지게까지 했다.

지난해 여름, 중국으로 강의를 갔다가 광조우의 작은 가게에 들렸을 때 검은 무채색의 먹으로 그려진 산 그림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구입했던 우유빛 도자기 잔이 오랜만에 세상을 보게 된 날이었다.

갑자기 소낙비를 몰고 오는 검은 구름이 세상을 덮을지라도 나는 가슴이 전혀 아플 것 같지 않은 행복감에 젖은 채 "까똑"하며 나를 애타게 찾는 모바일 폰을 열었다.

도대체 요즘은 스마트폰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정보가 '업 투 데이트'하지 못하면 우리도 결국 스마트해질 수 없다는 결론이고 보면 가슴 한구석이 왠지 좀 답답해진다.

한 달에 한번 맞이하는 오랜만의 휴일이라, 오늘은 왠지 좋은 일들만이 생길 것 갔다는 예감으로 폰을 열면서 낯익은 전화번호가 뜨기에 나는 속으로 내심 무척 반가웠다.

Y신문사의 A기자였다. 명석하고 안정된 미래를 준비하느라 밤을 세워 논문 작업을 하던 바로 그 잘 생긴 A기자였다. 박사학위를 받던 날은 진료를 받으며, 성취감에 들뜬 채 행복에 겨워했던 그였다.

그는 노후 준비를 위해 요즘 유행하는 프랜차이즈형 커피숍을 2년 전에 문 열었다. 그동안 일만하느라 몸 관리를 하지 못해 노화가 빨리 왔다면서, 건강테크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던 그였다. 진료예약을 하러 메시지를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의사의 입장인 나로서는 착한 환자(?)가 반갑기조차 했다.

아니 마치 할아버지가 귀여운 손주를 보듯, 기특하기조차 했다. 그런데 기쁨도 잠깐 "퍽!!" 소리와 함께 나는 결국 머그잔을 떨어뜨렸고 진한향기와 함께 엎질러진 커피잔은 산산 조각이 나고 말았다.

"A○○ 본인사망. 장례식장: △△△영안실. 발인: 6월 x일. 장지: 경북 성주군 XXX 공원묘지."
믿을 수 없는 문자였다.

순간 2년 전 진료를 마치고 손을 흔들며 나가던 작은 체구의 당당한 그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커피숍을 열던 날 그는 희망에 들 떠 있었다. 은행에 융자를 내고, 친지를 비롯한 주위사람들의 주머니 속에서 부터 그의 십시일반 경영이 시작됐다.

어느 날이던가, 몹시 비가 오던 날 문자가 왔다. 커피숍이 너무 일손이 많이 필요해서 병원 올 시간조차 없다는 내용이었다.
최저 임금측정으로 인해 기대 했던 것 보다 경영이 너무 힘들어서 직원을 하나씩, 둘씩 내보내고 있다고 했다. 급기야는 모든 직원을 내보내고, 인건비도 줄일 겸 와이프랑 두 사람이 올인 하기로 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커피숍은 커피향과는 달리 돈을 벌기에는 녹녹한 곳이 아니었고, 결국 파산선고를 기다려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로 받을 곳 없던 그는 외로웠다. 다정했던 부부도 돈 때문에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외로움과 소통 부재의 자존심은 그를 결국 벼랑 끝으로 몰고 가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병으로 죽을 이유가 없었던 그였기에 하얀 종이 위에 쓰여진 유서의 글자 한자 한자가 더욱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1970∼1980년대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자리 잡아왔던 전 연세대 M교수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노골적이고 너무도 적나라한 성적소설을 쓴 까닭에 학교에서 파면당하고 가족까지 멀어져 갔고 옥살이까지 했던 그 교수의 삶은 란만장 그 자체였다.

참으로 획기적이라고까지 느꼈던 그의 소설도, 요즘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장밋빛 호텔과 젊은 여인들의 현란한 네일 아트로, 이젠 더 이상 우리들에게 선정적이지도 아니 말초적 자극조차도 그 힘을 잃고 말았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보는 게 두려웠고, 끝끝내 얼굴도 상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보내고 말았다.

M교수의 삶은 고독과 가난으로 점철됐고, 우울증 약과 친지의 경제적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는 지인들의 얘기였다.
"나 지금 너무 힘든데 와줄 수 없니?"

M교수는 숨지기 1시간 전에 친구에게 SOS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죽음을 앞둔 사람이 전화를 한 사람은 어떤 친구일까?
살다 보면 누구라도 이럴 때가 있을 것이다.

너무 힘들어서 지쳐 있을 때, 누군가에게서 위로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 과연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까? 
그때 과연 내 곁에도 내 빈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있을까?

그때 위로받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이들을 우리는 진정한 친구라고 부른다.
누군가 이렇게 명명했다.

친구란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이고, 친구란 한 집에 살지 않지만 아내나, 남편 같은 존재라고….
아무런 얘기 없이 차 한 잔을 마셔도, 눈빛 하나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읽고 그의 주머니 사정까지 알 수 있는 사람, 연락 없이 불쑥 찾아가도 반갑게 맞아줄 사람, 그런 사람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친구가 아닐까?

진정한 친구는 가장 큰 축복이라던 라 로슈푸코의 말이 생각난다.
외롭고 힘들 때 와줄 수 있는 그 한사람의 친구로 인해, 거칠고 소용돌이 치는 세상의 힘든 강물을 건널 수 있는 힘을 우리는 얻게 될 것이다.

세상에 처음 선보이던 날이 마지막이 된 아꼈던 나의 머그잔처럼, 젊음을 스스로의 손으로 마감한 A기자의 하얀 유서가 자꾸만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웬일일까?
산다고 바빠서, 사랑은커녕 차 한 잔의 여유도 없이 앞만 바라보고 살아온 내겐 그의 외로움에 의사로서 반쯤 책임감을 가져옴을 피할 수가 없다.

환자를 치료하면서 반드시 검사를 하고 보여 지는 유물론적 치료처방을 해야만 의료행위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에서 나는 과연 그를 위한 진정한 치료를 해왔던 것일까.
스스로를 반문해본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해오던 나였기에, 의사의 사랑이 필요한 것이 환자일진데 나의 환자에 대한 사랑의 한계는 어떻게 설정돼 왔던 것일까….
"꿈이 있는 한 희망은 숨 쉰다"
"믿음이 있는 한  희망은 숨 쉰다."

나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숨 쉬게 하는 친구 같은 의사가 되어줄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우리들에게도 희망이 사라진 죽음에 이르는 병, 한 번 밖에 없는 삶을 스스로의 외로움과 절망으로 마감하게 하지 않는 친구가 필요한 때이다.

살며, 사랑하며, 세상의 힘든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는 삶을 기원해 본다.
우정도 물을 주고 가꿔야 한다고 하지만, 누군가 세상의 벼랑 끝에서 허우적거릴 때 어둠속에서 말없이 다가가서 손을 내밀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의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역류성 식도염 환자처럼 나는 가슴이 답답해오고 급기야는 가슴에 흉통까지 느낀다.
시큼한 위액이 역류하는 것을 시큰거리는 코끝에서 감지하며 조용히 뇌아린다.
나는 누구에게 전화를 할까.

"나 지금 너무 힘든데 와 줄 수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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