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9 14:11 (금)
그리운 처방전
그리운 처방전
  • Doctorsnews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7.06.16 17:54
  • 댓글 1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연종 원장(경기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

 
처방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건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진료 때 마다 챙겨야 했던 수많은 필름은 이미 자취를 감췄다.타과와 협진을 위해 썼던 고진선처의 손 편지도 전자차트가 대신한다.손이 닳도록 휘갈겨 썼던 진료 기록지는 사라진지 오래 됐다.치료도 첨단기술 중심의 맞춤의료로 바뀌었다.

알파고의 등장으로 인공 지능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더 뜨거워졌다. 인공지능 의사로 유명한 '닥터 왓슨'은 현재 의사의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지만 몸에 대한 빅데이터를 학습하고 이를 기반으로 암 진단이나 치료법을 제시한다. 인공관절 수술에서는 로보닥 수술이 보편화돼 가는 추세이다. 미래에 사라질 직업 1순위에 의사가 포함돼 있다. 우리는 머지않아 '사라진 처방전'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한국의사시인회 다섯 번째 시집 <그리운 처방전>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그리운 얼굴들이 다시 모였다, 지난 토요일 진료를 마친 회원들이 서울역 중식당 T원에서 자리를 함께 한 것이다. 저자들은 모두 의사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또한 시를 사랑하는 공통점이 있다. 의사시인이라 하기도 하고 시인의사라고 하기도 한 누명 같은 명함.

"회원들의 시를 읽다 보면 환자의 이야기와 진료실 풍경이 많이 보인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편집회의를 하며 큰 문제가 생겼다. 첨부된 경력이 너무 길고 빼곡하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의사로서 열심히 살아온 발자국들이다. 그러나 우리 운영위원들은 과감한 결심을 해야했다. 근무처만 남기고 의사로서의 약력은 싹둑 잘라 버렸다. <한국의사시인회>의 궁극적 존재 이유는 단순히 친목회 성격의 '의사인 시인'의 모임이 아니라 '시인인 의사'의 모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사시인회 회장인 김승기 시인은 인사말을 통해 의사의 역할과 함께시인의 책무를 강조했다.

내빈 소개가 있고 곧바로 시 낭송이 이어졌다.

배경 음악도 없고 마이크도 없는소박한 낭송이었지만 시 곳곳에 담긴 진심은 충만했다.

이 빠진 할머니 입을 손으로 가리고/감사하다고/줄 것도 없고/점심이라도 사 드시라고 꼬깃꼬깃/품속 만 원짜리 한 장//
오래되고 폭신한 냄새/하루 종일 따라 다녔다
- 박권수,「처방전」전문

10일 열린 한국의사시인회 <그리운 처방전> 출판기념회에서 시를 낭송하고 있는 김연종 시인.
처방전을 받아 든 할머니는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 못할 고민을 털어놓고 오랜 시간 상담을 받고 처방전까지 챙기고 단 돈 1500원을 내기에는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품속에 꼬깃꼬깃 아끼고 아꼈던 거금을 젊은 의사에게 모두 드린다. 이제 할머니의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하다. 이를 받아든 의사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할머니를 대접해도 시원찮은 판에 촌지라니. 그렇다고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없을 터. 안쓰럽고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하루 종일 그를 따라 다닌다. 오래되고 폭신한 냄새는 더 큰 위로가 되어 시 속에 녹아든다.처방전은 의사가 환자에게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할머니에게 받은 셈이다. 아무리 세상이 복잡하고 어지러워도 이런 처방전 하나 받으면 하늘이 말개질 것 같다.

생음악처럼 맑고진솔하면서도 한결같이 묵직한 시 들이다. 낭송을 마치고 간단한 기념 촬영을 하고 폐회했다. 오늘은 2차가 없다고 공지했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근처 맥주집에 다시 모였다. 거기에서도 문학과 의학의 화두는 변함이 없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대화의 내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의학과 문학의 경계를 허물고 자유로운 상상을 펼친다는 게 우리에겐 늘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부질없는 질문이자 고민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이미 알파고에게 사유의 왕좌자리를 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알파고는 그들만의 대결을 통해 더 업그레이드된 버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알파고가 들고 나온 수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수들이었다. 최고의 경지로 자체 진화한 알파고가 신의 한 수를 포기하고 더 인간적으로 변했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

아날로그식 처방전이 사라지고 안면이나 홍채 인식을 통한 처방이 이뤄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시인의 언어로 세상을 조명해야 할 때가 아닐까.

"환자와 의사 사이의 소통이 처방전이라면 그것은 시와 독자 사이의 소통의 양식과도 무척 닮아 있다. 환자들을 대할 때 의사의 내면엔 무수히 많은 층위의 사유가 진행된다. 그것이 질환과 환부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이 '처방전'이다. 그게 아픔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시가 말해지는 형식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시인의 의술 또한 그와 같아서 시(詩)의 술(術)이야말로 실제로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하다. 의학적 공간과 서정적 공간의 좌표들이 협업해 의미 있는 모종의 너와 나 사이를 유동하는 저마다의 별자리이다."

내빈으로 참석한 황학주 시인은 <그리운 처방전>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소회했다.

"의사라는 직업은 가파른 경사에 서 있는 환자들을 접하고 그들이 서 있는 경사를 펴서 편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펴도 펴도 끝없이 밀려오는 가파른 경사! 우리는벌써 생의 부조리를 알아 버린 '이방인'이다. 시지프스가 묵묵히 비탈을 향해 공을 굴려 올리듯 환자를 치료하며 고단함을 묻지 않는다. 예술의 생명은 독특함일 것이다. 우리는 늘 비탈의 언어들 속에 있다. 의업(醫業)에 충실하다 보면 생생한 불립문자들이 주위에 널려 있어 우리가 굳이 독특함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 역시 회장님답다. 평소 우리들의 고민을 사이다처럼 시원하게정리해 준다.

우리는 저마다의 목소리로 저마다의 고충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시간도 점점 깊어졌다. 광주에서 대구에서 대전에서 KTX를 타고 왔던 회원들이 다시 KTX를 타야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아쉬운 작별을 하는 히포크라테스 후예 시인들의 머리 위에는 저마다의 별자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