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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수술 하기엔 난 너무 지쳐있었다"

"야간수술 하기엔 난 너무 지쳐있었다"

  • 박소영 기자 syp8038@daum.net
  • 승인 2016.08.26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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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중 '기본 업무 소홀', '야간 응급 진료 지연'이 가장 많아
연구진들 "전공의 개인 문제보단 병원의 구조적 문제로 봐야"

"어느 날 밤, 복강내출혈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왔다. 심한 고통을 호소했으나 응급 수술이 필요해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진통제를 주고 아침으로 수술을 미뤘다. 죄책감을 느끼긴 했으나 응급 수술을 하기엔 나는 너무도 지친 상태였다."

"혈압이 조금 불안정한 환자였다. 혈압은 말초삽입으로도 조절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으나 나는 1년차 전공의를 훈련시킬 요량으로 중심정맥관을 삽입하도록 했다. 나는 다소 양면적인 감정을 느꼈다. 물론 카테터는 그 환자에게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1년차 전공의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나는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종종 샌드위치나 쿠키를 먹곤 했다. 다른 전공의들도 마찬가지였다. 전공의들은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며, 환자 옆에 머무르는 게 낫기 때문이다. 사실 중환자실은 이러한 부주의한 행동으로 오염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이 점을 깨닫지 못했다."

"상태가 위독한 환자의 가족들은 심폐소생술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가족들은 전문가가 아니므로 의사의 조언에 따라 결정하는 경향이 짙다. 솔직히 말하자면, 심폐소생술을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긴 적이 가끔 있다. 가망이 없는 환자들에게 한하긴 했으나, 야간에 불려나오지 않길 원했던 내 바람이 없었다곤 할 순 없다."

"유명인이 내원하면 일부 전공의들은 진료기록을 재미삼아 읽어보곤 했다. 몇 번이나 이를 목격했다. 진료기록에는 과거 임신사실이나 성병 등 민감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이를 본 일부 전공의들이 환자의 비밀을 지켰을 것이라 생각하기 어렵다. 어떤 루머는 진료기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몇몇 전공의들은 부적절한 언행을 보이기도 했다. 흔한 경우는 아니나, 전공의 3년차가 휘두른 폭력으로 1년차의 이빨이 부러진 걸 봤다. 물론 가해자의 성격이 가장 큰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데 있다. 연차가 낮은 전공의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엔 이 사회는 너무도 위계가 엄격하다."

"한 대상포진 환자가 외래 진료를 받으러 왔다. 그는 2주 전 응급실을 방문한 후 매일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전에 진료한 의사가 최적 복용량보다 5배나 더 세게 약을 처방한 것을 발견했다. 다행히 환자는 부작용을 보이지 않았고 나는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은 채 복용량을 조절했다. 내 실수였다면 환자에게 이 사실을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료의 실수를 들추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데이터를 분석할 때 종종 데이터 조작의 유혹에 빠지곤 했다. 어느 날은 긍정적인 결과값을 만들기 위해 몇몇 극단값을 삭제한 적이 있다. 데드라인을 맞출 시간은 너무도 부족했다. 나는 이 쓸모 없는 연구는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므로 작은 조작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이는 3∼4년차 전공의들의 '양심 고백'이다. 이들은 과도한 업무와 부족한 시간,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일상 등으로 수련과정 중 다양한 윤리적 갈등상황에 마주치며 많은 비윤리적 행위를 저지른다고 털어놨다.

지금까지는 이러한 사건들을 전공의 개인의 성격이나 성향 등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한국의료의 눈부신 발전에도 여전히 이러한 일들이 지속해서 발생하는 것은 전공의 수련과정 및 병원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의인문학교실 이영미 교수팀(이영미·장형주·이영희·권효진)은 최근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한 '한국 전공의 수련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윤리적·비전문적 행위 조사'(Investigation of Unethical and Unprofessional Behavior in Korean Residency Training)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논문의 제1저자인 장형주 조교는 대학부속병원의 17개 임상과에서 전공의 20명을 모집해 개인별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양한 사례를 수집하기 위해 임상 경험이 풍부한 3∼4년차 전공의를 대상으로 전공의 수련과정 중 저질렀거나 목격한 비윤리적 행위를 수집했다.

그 결과, 총 48개의 전공의 부적절 행위 사례가 추출됐으며 이들은 다시 8개 범주로 분류, ▲부적절한 진료행위 ▲근무윤리 위반 ▲이해관계 충돌 관련 부적절행위 ▲환자에 대한 정직성 원칙 위배 ▲환자 기밀유지 원칙 위배 ▲환자존중 정신 부족 ▲ 동료존중 정신 부족 ▲연구윤리 위반 행위가 드러났다.

전공의 1명당 3∼18개의 부적절 행위 사례를 털어놨으며 특히 '입원환자 상태 확인 등 주치의로서의 기본 업무를 소홀히 한 행위', '정당한 사유 없이 야간 응급환자 진료를 지연하는 행위', '꼭 필요하지 않은 검사까지 과도하게 시행하는 행위', '환자에게 수술 및 시술 내용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행위', '병원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환자의 개인정보를 이야기하는 행위' 등이 많이 언급됐다.

연구진들은 "부적절한 행위의 원인은 다양해 보인다. 그러나 많은 사례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경향이 있었다"며 "특히 어떤 행위는 전공의 개인의 성향이나 성격보다는 병원의 문화나 수련환경이란 외부적 요인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실제 수련환경에서 겪는 윤리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모든 전공의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전공의의 부적절 행위를 감독할 뿐 아니라 이를 조언하고 치료할 수 있는 모니터링 시스템이 전공의 교육 초기 단계부터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한 사람을 여러 각도에서 평가하는 360도 다면평가처럼 다층적인 방법으로 전공의들의 숙련도와 태도, 수행능력 등을 평가할 보다 엄격한 평가방식이 적용돼야 하며. 대학원에서의 의료전문 교육은 학부의 연장으로서 더욱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 논문은 국제학술지 'Teaching and Learning in Medicine'에서 2015년 최우수 논문상(Annual Editor's Choice Award)을 최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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