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말하지 못한 죽은 자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것은 바로 산 자들의 몫. 법의학은 '과학적 증거'를 통해 죽은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진실을 규명한다.
의학이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것과 같이 법의학은 사회적 생명인 '인권'을 살린다.
서울의대 법의학교실 김문영 연구 조교수는 매주 화, 수요일 시신과 마주한다.
'사체를 해부한다'는 편견을 딛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일’을 하고자 법의학자가 됐다는 김교수. 그러나 '부검실' 밖 법의학의 현실은 녹록치 않다.
김 교수는 현 검시제도에 대해 “시신 검안, 부검여부의 판단, 사망 진단서 작성 등 법의학적인 판단이 매우 중요한데, 정작 법의학자가 개입할 수 있는 제도가 보장돼 있지 않다”며 억울한 죽음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는 제도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한다. 그녀는 또한 “캐나다의 경우 범죄에 의한 사망뿐만 아니라 자살, 병사, 사고사 등에 대해서도 부검을 통해 통계를 내고 제도를 개선한다” 며 예방 가능한 죽음에 대비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우리나라 법의학자들은 연간 약 8000여 건의 변사체를 부검한다. 대한법의학회에 따르면 부검을 할 수 있는 법의학자는 전국에 59명. 매년 변사자 수는 늘고 있지만 법의학자는 턱없이 부족하고, 앞으로 법의학자가 될 의사 전공자 역시 전국에 단 4명뿐이다.
이렇듯 법의학이 고사상태에 직면한 것은 임상의사보다 낮은 보수, 인력난의 악순환으로 인한 업무가중 등 처우의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바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제도가 뒷받침 되고 있지 않은 것.
26년간 법의학의 길을 걸어온 서울의대 법의학교실 이숭덕 교수에게 김문영 교수는 의사 출신 3번째 제자다. 그만큼 법의학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숭덕 교수는 26년 전이나 지금이나 법의학의 열악한 현실이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 언제까지 법의학자들에게 '부검'이라는 희생만 강요하고 긍지와 보람을 주지 않을 것인가.고생을 하면서도 억울한 죽음을 밝히면 사회가 나아질 것이라는 신념으로 버티고 있지만 제도는 변하지 않는다." 라고 항변한다.
2018년 11월 대한법의학회는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고, 범죄를 예방하는 등 국가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죽음의 유형을 '변사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했다.
수사당국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된 변사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 범죄를 포함한 자살, 사고사 등 사회적 죽음에 대해서도 부검을 통해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숭덕 교수는 “더 이상 억울하거나 의문이 남는 죽음이 없도록 검시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고 강조하며 “법의학이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학문으로 자리매김 할 때 비로소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책임을 요구하며, 검시제도 관련 법률 제정을 촉구하고 있는 법의학자들의 물음에 이제 국가가 대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