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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협진은 의술의 미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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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11.1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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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중식 한림의대 교수(강동성심병원 감염내과)
▲ 엄중식 한림의대 교수(강동성심병원 감염내과)

2001년,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필자는 산부인과 병동 한 구석에서 자궁암으로 10년 이상 수술과 항암요법을 반복한 한 여성 환자의 엄청난 양의 의무기록 속을 헤매며, 협진(컨설트)을 보고 있었다. 협진 의뢰 내용이라는 것이 밑고 끝도 없이 '귀과적 진료를 의뢰합니다'라고 끝을 맺기 때문에, 협진의 목적부터 찾기 위해서는 과거 입원 기록부터 열심히 찾으며 정리할 수밖에 없다.

마침 산부인과 담당 교수님과 전공의가 회진을 위해 병동을 지나치고 있었다. 의무기록에 파묻혀 있는 필자가 보이지 않았는지, 담당 교수님이 전공의에게 감염내과 협진을 한 이유를 물으니 전공의가 우물쭈물거리며 '감염내과에서 협진을 보면 환자의 과거와 현재 상황을 잘 정리해 주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요즘 청소년들이 즐겨 쓰는 말을 인용하면 정말 '멘붕' 상황이었다. 결국 회진을 마친 산부인과 전공의를 준비실로 불러 따끔하게 야단을 치고 나서야 상황은 종료됐다.

사실, 협진을 의뢰하는 내용을 보면 해당 주치의나 전공의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얼마나 환자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현재 치료 과정이 환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금방 파악할 수 있다.

또 협진에 대한 회신 내용으로 회신한 의사의 의과학적 지식수준과 경험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협진의 '의뢰와 회신'은 해당 병원 의료진의 수준을 비교적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감염내과의 진료 업무 중 협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과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루에 처리해야 하는 협진 의뢰건수가 휴일 후에는 20~30건씩 밀려 있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협진 한 건을 처리하는데 초진 환자를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감염내과 협진이라는 게, 감염질환의 진단부터 치료 방법 특히 항생제 사용 여부와 변경, 중단까지 의뢰내용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만약 희귀하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균이라도 나오면 참고문헌부터 찾아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여간 애를 먹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복잡함과 까다로움이 환자의 치료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한다. 전공의 3년차 당시 감염내과를 돌 때 일이다. 50대 후반의 수막염 환자가 질환의 원인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항생제 요법에 반응하지 않자 협진이 의뢰됐다. 감염내과에서는 의식불명으로 중환자실에 누어있던 환자의 아래쪽 엉덩이에서 가피를 발견했고, 쯔쯔가무시병을 진단하고 doxycycline을 투여했다.

이후 이틀 만에 환자가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된 모습을 본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고 흐뭇한 추억이다. 반면에 불명열의 원인을 찾지 못해 몇 달 간 온갖 노력을 다했음에도 원인조차 밝히지 못하고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한 환자의 마지막 모습과 어머니의 절규는 아직도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사실 감염내과 뿐만 아니라 의료의 질적 수준을 올리는데 있어 의료진 간의 협력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의료 현장에서 협진이 지체 없이 이뤄지는 경우를 보기는 쉽지 않다. 협진을 기다리느라 퇴원이 오후 늦게까지 지체돼 환자나 보호자가 큰 불편을 겪고 이로 인해 병동에서 고성이 오가기도 한다.

이는 병상 회전율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실 경영상의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고, 반대로 협진을 통해 새로운 진단과 치료를 위한 처방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일부 병원에서는 의료진이 24시간 이내에 협진을 처리하는 경우 협진 건당 인센티브를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회신을 주로 하는 입장에서 협진은 다소 힘에 부친다. 얼마 전 협진 수가가 오르기는 했으나 품이 드는 것에 비해 수가가 너무 낮고 진료실적 평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거나 아예 없다 보니 좋은 회신을 위한 노력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협진을 의뢰하는 입장에서도 그렇다. 특히 전공의들이 협진을 빨리 보기 위해 의뢰한 선생님을 애타게 찾아다니고 기다리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그러지 않아도 과중한 업무로 피곤한 전공의가 협진을 직접 부탁하러 외래나 연구실 밖에서 기다리다가 졸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필자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선진 의료기관은 협진에 있어 확실히 국내와는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다. 몇 년 전 연수를 갔던 존스홉킨스병원 감염내과 교수가 컨설트를 받아 회신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는데, 회신 내용이 거의 증례 원고를 쓰는 수준으로 5~6쪽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회신을 하면 도대체 하루에 몇 건이나 처리할 수 있냐고 물으니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일주일에 2~3건 정도 처리해서 문제없다는 응답이었다. 컨설트 회신에 대한 비용도 환자 부담으로 보통 건당 300달러 정도라는 대답에도 할 말을 잃었다.

과거 의료의 질이 의사 개인의 역량에 의해 결정되던 시기와는 달리, 현재는 의료진의 개인 역량을 넘어 첨단 장비와 시설 그리고 협진 시스템에 의해 그 질과 수준이 결정된다. 그런데 병원을 운영하는 경영진과 진료를 하는 의료진이 첨단 장비와 쾌적한 시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거액을 투자하고 이를 홍보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에 비해 협진의 중요성은 간과하는 것 같다.

첨단 장비와 쾌적한 시설이 환자에게 만족감을 줄 수는 있겠지만, 환자를 감동시키는 것은 결국 의료진이고 그 의료진 간의 원활한 협진이야말로 환자에게 최상의 진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을 우리 의료계가 부디 잊지 않았으면 한다.

"여러분, 협진은 우리가 환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인술이며 미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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